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라기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 줌의 삶을 기탁하려 왔다


<감상> 우리는 현세에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고, 부귀공명도 잠시 맡겨두려 왔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재산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것이 상례다. 나목은 봄이 되면 초록이 몰려오지만, 고목에는 새순이 돋지 않는다. 나이테 없이 썩고 새에게 집도 되어 주지 못하는 고목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자. 기쁨과 근심,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지 않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한 줌 연기처럼 모든 걸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하고, 주체적으로 고독과 함께 하는 삶을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이 봄밤에 인간답게 참다운 정신을 탄탄하게 할 수 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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