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학령기 아동을 슬하에 둔 학부모들의 흔한 고민 중의 하나가 “왜 우리 아이는 늘 같은 책만 볼까?”입니다. 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생기면 그것만 줄창 봅니다. 자라나는 키만큼 아이의 독서(문화) 수준도 쑥쑥 향상되면 좋겠는데, 정신 연령은 늘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정 서점에 같이 가서 양서(良書)를 골라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책은 끝까지 사지(읽지) 않겠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희집 아이도 그랬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아버지가 권하는 책 한 권, 자기가 고르는 책 한 권, 그렇게 타협을 보자고도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독서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으로 양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조급함이 ‘아이들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조니가 저녁 시간에 늦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데도 없었어요”라고 대답한다. 혹은 우리가 “도대체 너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시간과 시계와 시간표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대한 일종의 미묘한 위협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마리아 니콜라예바(김서정), 『용의 아이들』>


아이들의 시간이 어른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 유소년기의 반복적 독서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많이 해소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반복적 독서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① 본능이다 : 모든 반복은 쾌를 선사한다. 예술적 쾌의 태반은 반복에서 온다. 낯선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본능이다. ② 서사 규범 훈련이다 : 정해진 이야기 법칙을 익힌다. 몇 가지 중요한 플롯을 익혀서 후일의 확산적 응용에 대비한다. ③ 내부 정보 환기 훈련이다 : 정보 획득은 외부에서 얻는 것과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 두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후자에서처럼 같은 것을 읽어도 늘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④ 애정 행위이다 : 일종의 페티시즘(주물숭배 이상색욕)이다. 좋아하는 내용, 좋아하는 장정(裝幀)에 대한 강박적인, 반복적인 애정 표현이다.

①과 ④는 심리학적 이해입니다. 예술론에서도 리듬과 패턴이라는 말로 ‘반복의 미학’을 설명합니다. 눈(귀)에 보이거나(들리거나) 숨어 있거나 예술은 반복이 주는 쾌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독서 행위도 일종의 예술 행위로 보아야 합니다. 독서를 실용적 차원에서만 권장하면 아이는 이내 책 읽는 흥미를 잃게 됩니다. 부모의 ‘권장 도서’를 끝까지(손해를 감수하고) 거부하는 아이는 자신의 예술 행위에 대한 부모의 방해를 힘들게 막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②와 ③은 문학(문장론)적 이해입니다. 아이들의 독서물들은 플롯이 대동소이합니다. 주로 <분리-시련-귀환>의 플롯을 가진 이야기들이다. 비슷한 사건에 비슷한 결말, 비슷한 교훈이지만 아이들은 그 ‘반복하는(뻔한)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이야기의 규범(canon)을 익히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동원한 창발적인 해석행위에 몰두합니다. 이때 ‘해석행위’라고 하는 것은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적 감응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의 시간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는 반성이 듭니다. 동시에, 없던 고민이 하나 새로 생깁니다. 이 세상을 뜰 때, “도대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아무데도 없었어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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