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광장] 잘못된 권력의지의 부끄러운 유산
[아침광장] 잘못된 권력의지의 부끄러운 유산
  •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21년 02월 24일 15시 58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2월 25일 목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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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829년에 미국의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은 워싱턴 정가의 엘리트 서클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1789년에 미국 남부 테네시주를 대표한 연방 하원의원, 1797년에 연방 상원의원, 1798년에 테네시주 대법관으로 선출된 잭슨은 1812년 미영전쟁 당시 테네시 민병대장으로 활약, 1815년 1월의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워싱턴 정치 자체를 혐오했던 관계로 연방 정계의 실력자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했던 잭슨은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북동부 엘리트 중심의 정치체제를 박살내고 남부에서 노예를 부리면서 농장을 경영하는 백인들의 권익을 앞세우겠다는 소위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를 내세워 당선되었다.

당시 메릴랜드주 법무장관이었던 로저 터니(Roger Taney)는 잭슨의 몇 안 되는 초창기 엘리트급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반노예주의자로 이름이 났으나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터니는 잭슨의 선거운동을 도와 연방 법무장관에 임명되었고, 이후로 ‘잭슨 민주주의’의 핵심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앞장서는 ‘돌격대’ 역할을 도맡았다. 당시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고 있던 미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이 미국 북부의 상공업자와 개발업자 등 일부 특권층만 돕는다고 생각한 잭슨이 은행을 아예 폐지하려고 하자, 터니는 잭슨의 이 위험하고 포퓰리스트적인 방침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여러 국무위원들의 반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폐지를 관철시켰다. 결국 많은 이들의 우려대로 미국은행이 폐지되면서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주립은행들은 지폐를 남발하며 무분별하게 대출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출을 받은 사업들이 망하면서 주립은행들이 도산 위기에 빠지자, 예금자들은 주립은행의 지폐를 금 또는 은 등의 정화(正貨)로 대거 교환하고자 했다. 이에 정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주립은행들이 교환을 중단하면서 이들이 발행한 화폐는 휴짓조각이 되어버렸고, 이는 1837년의 금융공황으로 이어지며 대규모 실업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출세를 향한 터니의 질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잭슨은 미국은행 논란에서 자신을 도와준 보답으로 1833년에 터니를 재무장관에 임명하였고, 1835년에는 터니를 대법원장 자리로 승전시켰다. 자신을 만들어준 ‘잭슨 민주주의’에 대한 터니의 충성심은 사법부의 수장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857년 3월, 드레드 스콧(Dred Scott)이란 노예가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自由州)에 거주했었다는 근거를 들어 자신이 자유인임을 확인해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터니는 ‘흑인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연방 법원에 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고,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이므로 그 소유권은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판결하였다. 터니는 또한 연방의회가 노예제도의 확장 금지 권한이 없다고 결정함으로써 노예제를 둘러싼 미국 내부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고, 이는 결국 남북전쟁이라는 처참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의 단맛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자신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죽은 다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신경을 써야 하느냐의 여부는 오롯이 그 당사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살아생전의 권력의지를 충족하기 위해 정권에 맹목적으로 충성한 대법원장 로저 터니는 미국 사법 역사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겼으며, 한때 메릴랜드주 의회건물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그의 동상은 철거되어 지금 창고에 처박혀 있다. 한평생 영광을 누리다가 땅속 깊이 묻혀버린 자신이야 더 이상 알 바 아니겠지만, 선대의 과오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자식과 손자, 후손의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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