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혜공이 나눈 선문답, 천년고찰 이름이 되다

오어사와 절벽위 자장암 전경.

봄이 일찍 왔다. 2월 하순인데, 입춘 지나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서둘러 왔다. 산하에 2021년 신상 봄이 자글자글하다. 화신풍(花信風)이 불었고 소식을 들은 매화가 몸을 먼저 열었다. 바람은 또 산수유 노란꽃을 데려왔다. 여기저기 매화 소식이 들리는가 하더니 뜨락에 산수화가 폈고 직박구리 떼 지어 답청 나와 산수유나무를 점령했다.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계곡에 봄 물 풀리는 소리 같다.

운제산 오어지의 이른 봄 풍경은 괴질이 점령한 지구촌 풍경의 압축판인 듯 스산하다. 저수지 물이 바짝 말랐다. 계곡 상류에서부터 오어사 지나 원효교 출렁다리까지 못 바닥이 마른버짐 퍼져 나가듯 바닥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났다. 가슴 속에 서걱서걱 먼지가 인다. 괴질이 번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가 삭막하고 어색하고 두렵다.

오어사 대웅전.

몇 년 사이 절 주변 풍경도 많이 변했다. 절 앞에 출렁다리를 세우고 저수지에 나무데크를 설치해 둘레길을 만들었다. 들머리에 커다란 일주문이 들어섰고 절 출입구에 덩치 큰 누각이 세워졌다. 가학루(駕鶴樓)다. 가학루는 조선 선비들이 누각에 즐겨 붙이던 이름이다. 학을 타고 날아가는 도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고려 후기의 문인 안축 (安軸, 1287~1348)의 시 ‘태백산을 오르며’에서 ‘구름 따르는 몸은 학을 타고 가는 듯 身逐飛雲疑駕鶴(신축비운의가학)’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구름과 학은 썩 잘 어울리는 시적 파트너이다. ‘구름 사다리산’ 운제산에 ‘학 타고 날아가는’ 가학루는 괜찮은 이름이다.

오어사는 진평왕(재위 579∼632)때 세운 절로 본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다. ‘항사’는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알이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절에 만년의 혜공스님이 살았다. 혜공스님은 ‘듣보잡’이었다. 귀족 천진공의 집 품팔이 노파의 아들로 이름이 우조였다. 천진공의 종기를 낳게 하고 아끼는 매를 찾아오면서 신령스런 이적을 나타내자 주인 천진공이 절을 했다. 자신의 영험이 드러나자 혜공은 승려가 됐다. 승려가 된 뒤에 술에 취해 삼태기를 진 채 춤을 추곤 해 ‘부괘화상’이라 불렀다. 절의 우물에 들어가 몇 달 동안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푸른 옷의 신동이 먼저 나왔고 스님의 옷이 젖지 않았다고 한다. 혜공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허공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 새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항사사’가 ‘오어사’로 이름은 바꾼 것은 대략 1400여 년 전 혜공과 원효가 밥 잘 먹고 장난처럼 벌인 법력 배틀(battle) 때문이다. 원효 역시 ‘듣보잡’ 출신으로 어디 한 곳 걸릴 데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때 상황을 『삼국유사』‘이혜동진’ 조는 이렇게 전한다.

원효가 여러 경전의 주해를 지으면서 매번 스님을 찾아와 의심나는 것을 묻거나 혹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루는 두 스님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똥을 누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면서 놀리며 말하기를 “너는 똥을 누었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오어사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원효스님의 말이라고도 하는데 잘못이다.

오어사 동종. 유물기념관 안에 있다.

혜공과 원효가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똥을 누는 배틀을 벌여 혜공이 이겼다는 말이다. 원문의 ‘여시오어(汝屎吾魚)’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라는 뜻 말고도 ‘너의 똥은 내가 먹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푸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오어사의 이름은 ‘여시오어’에서 왔다. 이 배틀에서 승자는 혜공이다. 혜공은 먹은 물고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고 원효는 잘 소화시킨 밥 찌꺼기를 결과물로 내놓았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승부에 다른 의견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단서를 단단히 달았다. 원문에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스님의 말이라고 하는데 잘못이다’라며 혜공의 팔을 들어준 손을 단단히 지지했다.

‘여시오어’는 유사 곳곳에 나오는 원효의 몇 차례 굴욕 중 하나다. 삼국유사에서 묘사되는 원효는 굉장히 인간적이다. 그는 신라시대 불법의 고수들에게는 봉이었다. 고수들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였고 일진들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푼수’였다.

오어사 출렁다리.

사복과의 일화다. 역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사복은 12살까지 말도 못하고 기어 다니던 덜떨어진 사람이다. 칠푼이, 팔푼이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원효와 함께 장사를 지냈다. 원효가 시신 앞에서 ‘나지 말 것을, 죽는 것이 괴롭나니. 죽지 말 것을, 나는 것이 괴롭거늘’ 이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사복은 말이 많다고 핀잔했다. ‘죽고 낢이 괴롭구나’라고 고쳤다. 천하의 원효가 칠푼이 팔푼이 사복에게 글짓기 첨삭지도까지 받는 굴욕을 당했다. 문장은 간단하고 명쾌해야 의사전달이 잘되고 강력한 힘이 생기는 법이다. 이 밖에 원효는 의상에게도 ‘1패’를 당한 적이 있다. 의상이 친견했던 관세음보살을 만나러 낙산사까지 갔다가 관세음보살이 만나 주지 않는 바람에 굴욕을 당하고 돌아왔다.

오어사는 한국 불교사의 별들이 총총한 은하계다. 신라 흥륜사는 법흥왕이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지은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이차돈 순교 17년 만에 진흥왕대에 완공된 절이다. 중국 양나라 사신 이호가 사리를 가져오고 진나라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이 불경을 가져왔다. 훗날 이 절에 신라의 10대 성인 소상을 안치했는데 그중 혜공, 의상, 자장, 원효 네 조사가 오어사에 머무르며 정진했다. 네 조사에 더해 삼국유사를 쓴 고려 시대 국사 일연스님까지 오어사에 머물렀으니 절의 내력과 거쳐 간 인물의 중량으로 치자면 가히 국보급이다.

자장암.

‘영일운제산오어사사적’(1774년)은 오어사를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운제산 이름이 원효와 의상, 혜공과 자장에 관한 설화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원효와 의상은 남쪽 벼랑바위에 살았고 혜공과 자장은 북쪽 산꼭대기에 머물렀다. 구름(雲)을 사다리(梯)처럼 걸쳐놓고 바위와 산꼭대기 오갔다고 해서 운제산, 구름사다리산이라 불렀다. 자장과 원효 의상은 중국의 종남산 운제사에서 공부를 했거나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이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8세기 중반 때까지만 해도 의상암과 자장암, 원효암과 혜공암이 있었던 것으로 ‘영일운제산오어사 사적’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오어지를 건너 절의 서쪽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는 원효암과 절의 북쪽 깎아지른 듯한 직벽 꼭대기에 서 있는 자장암만 있다.

원효암.

운제산 이름과 관련해 삼국유사는 다른 기록을 내놓고 있다. 신라 제2대왕인 남해왕의 왕비 운제부인이다. 시아버지가 박혁거세이고 시어머니가 알령부인이다. 죽은 뒤 역할을 부여받았으니 운제산 성모다. 삼국사기에는 아루부인으로 기록됐다. 주요 보직이 농사 관련이다. 가뭄에 기도를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해서 예전에는 기우제 명소였다고 한다. 비 내려주는 운제산 성모는 무얼 하는가.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약발이 떨어진 것인가. 2021년 2월 현재, 운제산 성모 발아래 있는 오어지가 타들어 가고 있다. 아름답던 오어사 풍경이 삭막하고 흉흉하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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