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24. 경주 건천 금척리
[우리동네 이야기] 24. 경주 건천 금척리
  • 황기환 기자
  • 승인 2021년 03월 07일 20시 06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3월 08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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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기 크고 작은 봉분마다 '신라의 전설' 묻혀있는 마을
금척리 경로당과 웃마을 입구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는 신라 전설이 묻혀있는 마을이다.

경주 서북쪽 12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영산(靈山) 단석산과 오봉산, 그리고 문화유산이 산재한 충의의 고장이다.

대부분 지역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편리한 교통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공장들도 눈에 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도와 양쪽 가장자리를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 국도4호선으로 인해 마을이 3등분으로 나뉜다.

하지만 신라 3기 중 하나인 금자가 묻혀있다는 금척(金尺)고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고향을 지키며 우렁이 쌀 작목반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문화해설가 한병권(63) 씨와 함께 금자(금척)의 전설에 얽힌 금척리를 둘러봤다.

△전설의 마을 금척리.

금척리는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대구 방면으로 가다 보면 국도 좌우에 즐비하게 늘려 있는 고분군들이 있는 마을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꿈에 나타난 신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신비의 금자(金尺)가 묻혀있는 곳이라고 해 ‘금척(金尺)’으로 불렸다.

이 마을의 동쪽에는 국도 4호선이 지나가고, 서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는 중앙선 철도가 관통하고 있다.

마을 중심을 지나가는 철도를 중심으로, 서편에 위치한 곡산 한씨 집성촌인 웃마을, 동편은 영천 이씨 집성촌인 아랫마을, 그리고 아랫마을 북쪽에 순흥 안씨 집성촌인 새각단, 금척고분군 남쪽 하천을 끼고 있는 오방골 등 네 개의 자연부락이 금척리를 이루고 있다.

한때 300세대 넘게 살았지만, 현재는 200여 세대로 줄어들었으며, 그마저도 70대 이상 고령의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금척마을 주민은 논농사 외에 한우 사육과 함께 포도 및 버섯과 같은 특용작물도 재배하고 있다.

특히 경주에서 유일하게 우렁이를 이용한 무농약 친환경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한병권 씨는 “금척마을은 곡산 한씨와 영천 이씨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집성촌에 순흥 안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지만, 이상하게도 김씨가 들어오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모두 떠나고 만다”면서 “한때 마을 곳곳에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는 등 금척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설의 마을이다”고 금척리를 소개했다.

사적 제43호인 금척리 고분군 전경
△금척리 고분군.

사적 제43호 금척리 고분군은 50여 기의 크고 작은 봉분들로 이뤄진 유적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금척을 하늘로부터 받았는데, 중국이 이를 탐해 사신을 보내자 금척을 이곳에 묻어 숨긴 후 40여 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금척인 것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다.

고분군은 서쪽으로 갈수록 봉분의 크기가 큰데, 가장 서쪽에는 표주박 모양의 고분이 있어 눈길을 끈다.

1952년에 경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국도 4호선 공사를 할 때 반이 잘려나간 고분 2기를 발굴했다. 조사 결과 이 무덤들은 삼국 시대 때 신라에서 주로 사용한 돌무지덧널무덤임이 확인됐다.
한병권 지역문화 해설가가 금척리 고분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금으로 만든 가는고리귀걸이, 은으로 만든 허리띠, 호박옥, 굽은옥, 쇠칼 등이 출토됐다.

따라서 이곳은 신라 수도의 6부 가운데 하나인 점량부 또는 모량부라고 불렸던 행정조직체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 고분의 구조와 고분에서 촐토된 유물로 미뤄 금척리 고분군은 5~6세기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1936년 8월 사적 제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조산(造山)새, 조산서리, 금릉, 금척릉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한때 고분군 곳곳에는 포도밭과 농가가 들어서면서 고분이 사라지는 등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다.
한병권 해설가가 옛날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인 금장원터로 추정되는 지역을 가르키고 있다.
이러한 금척리 고분군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그냥 방치만 하지 말고, 제대로 관리하고 개발해서 관광객을 유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병권 씨는 “어릴 적 금척리 고분군은 휴식처이자 놀이터였다. 마을주민들이 여름철 무더위를 피해 고분 위에서 잠을 자는가 하면, 밭을 이루거나 소를 방목하는 장소였다”면서 “최근에야 형식적이지만 울타리를 설치해 관리하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방치에 가깝다. 소중한 문화재를 덩그러니 두지 말고 제대로 관리를 해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그 가치를 널리 알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금척리 아랫마을에는 만취 이시강이 강학하기 위해 세운 정자 ‘만취정’이 있다.
△금척리의 다양한 유적.

금척리에는 고분군 이외에도 자랑할 만한 유적들이 마을 곳곳에 있다.

금척의 동쪽에는 금척원터로도 불리는 ‘금장원터’가 있다.

원이란 옛날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왕이 금척을 중국에 주기 싫어서 이곳에 수많은 봉분을 만든 다음 원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금장원이다.

그러나 금척 고분군 인근에 금장원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위치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한병권 씨는 “금장원터로 알려진 논에서 작업을 하던 경운기가 갑자기 땅 밑으로 내려앉아 그 자리를 파보니 옛날 화장실로 추정되는 큰 옹기가 묻혀있었다. 따라서 그곳이 알려진 데로 금장원 터가 아닐까 싶다”며 금척리 고분군 내 한 지점을 금장원터로 지목했다.
금척마을 입구에 있는 ‘부자신도비’
금척마을 입구에는 종이품 이상의 시호를 받은 자만이 세울 수 있는 ‘부자신도비’가 있다.

조선시대 좌찬성을 지낸 평절공 한옹과 그의 아들 문절공 유선 한 권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어, 이 마을의 기품을 가늠케 한다.

또 새각단 마을 입구에는 ‘금척리 열녀각’이 있다. 열부(烈婦) 안동권씨를 기려 1936년에 한옥으로 세워졌으나 1972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콘크리트 건물로 다시 세웠다.

국도변 금척 마을에는 ‘금척리 지석묘군’이 있다. 원래 3기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2기는 없어지고 고분군 북쪽 포도밭 중간에 1기가 남아 있다.

아랫마을에는 400여년 전 영천인 만취 이시강이 강학하기 위해 세운 정자인 ‘만취정’이 있다.

허물어전 정자를 193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금척리 웃마을에 있는 정자 ‘제극정’
웃마을에 있는 ‘제극정’은 조선시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세종 때 좌찬성 겸 개성류수를 지낸 곡산인 한옹을 추모해 그의 후손이 1948년 건립한 정자다.
금척리 웃마을에 있었던 서당 ‘금옥제’의 옛 모습.
이밖에 새각단 마을에는 순흥인 안상진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73년에 세운 정자 ‘옥화정’이 있으며, 웃마을에는 ‘금옥제’라는 서당도 있다.

또 웃마을에는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경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한병권 문화해설가는 “마을 주민들은 지금까지 금척리 고분군으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아 왔다”면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신라 전설이 묻혀있는 금척리 고분군을 정비하고 금장원터를 복원해 경주의 새로운 관광지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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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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