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아침 산책길에 아내의 목도리를 빌려 두르고 나갔습니다. 봄 날씨치고는 꽤 쌀쌀합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보통 3월 중순께나 찾아오는 게 상식인데 일주일 정도 이른 것 같습니다. 어릴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변변히 옷도 걸치지 못한 채 산 중턱에서 두어 시간 동안 호된 꽃샘추위에 떨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던지 그 이후로 3월만 되면 꼭 한 보름씩 몸살감기를 앓았습니다. 10년도 넘어 결혼 뒤에야 그 징크스가 깨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제 곁을 떠났습니다. 오늘 문득 그때의 꽃샘추위가 생각납니다.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헬싱괴르)성(城),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 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방미경), 『농담』)


그렇습니다. 사랑이든 상처든 ‘다가오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인생 텍스트가 허용하는 인물, 사건, 배경 안에서, 그것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생산해내는 경험의 구체성 안에서만 사랑도 있고 상처도 있습니다. 그에 비해 ‘다가오는 방식’ 자체가 누락된 일체의 추상(抽象)들은 그저 관념에 불과합니다. 모든 생각 이후에 오는 것들은 죽은 뿌리 위에 달려 있는 마른 잎과 같습니다. 거친 바람이 불면 힘없이 떨어집니다. 생각을 앞서서 찾아오는 것들이 항상 중요합니다.

첫 줄에서 말씀드린 아내의 목도리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내의 목도리를 두르고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부부유별, 서로 제 것만 사용합니다. 아내나 저나 각각 자기 것에 대한 관념이 아주 투철합니다. 평생을 함께했어도 저는 아내의 소지품이나 옷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장신구에 어떤 것이 있는지 가방은 무엇을 들고 다니는지 전혀 모릅니다. 물론 아내의 통장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주 옛날 연애 시절 자주색 얼룩이 세로무늬로 들어가 있는 긴 목도리를 한 번 빌려 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종의 친근감 표시로 그렇게 한번 해 본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빌려 두른 것은 그러니까 두 번째인 셈입니다. 이번에는 그 색이 보기가 좋아서 우정 빌렸습니다. 진한 푸른색입니다. 아내가 동네 마실 나갈 때 그냥 휙 감고 나가는 긴 털실 목도립니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잠이 덜 깬 상태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목도리를 아무렇게나 두르고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아내가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진짜 아내가 아니라 목도리에서 나는 아내의 몸냄새였습니다. 순간 뒤를 돌아다볼 뻔했습니다. 문득, 처음 아내의 체취를 맡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목도리였습니다. 누구는 향수, 누구는 비누 냄새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제가 처음 아내의 냄새를 맡은 건 그냥 생활적인 어떤 냄새였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체취를 거기서 맡았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가파르게 도시의 배후로 자리 잡고 있던 바닷가 산 중턱 어디에 선가에서 속수무책으로 맞이했던 ‘3월의 한기’ 이후에 내내 비어있던 한구석이 순간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빈 곳을 메꾸는 것들, 채워져 의미가 되는 것들은 늘 그렇게 구체적이고, 순간적이고, 생각 이전에 오는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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