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제가 근무하는 대학의 교육대학원에 ‘문예창작, 스토리텔링 전공’이 생긴 지 3년째입니다. 3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대학원생들이 열정적으로 글쓰기(문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성과도 나오고 있고요. 시, 소설, 수필 등 각 장르에 들어가기 전, 첫 학기에 글쓰기란 무엇이며, 글 쓰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인간이어야 하는가)를 공부합니다. 제가 나이도 좀 있고 해서 그 강좌를 담당합니다. 3월에 개학해서 같이 공부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글은 쓰지 말자. 글은 나누어야 하는 사회적 공기(公器)다. ②나르시시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에는 타자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③지혜는 진리보다 못하고 진리는 윤리보다 못하다. 글쓰기의 욕망은 항상 자본의 욕망과 대립한다. ④기교는 절박함에서 나온다.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에 몰두하자. ⑤글쓰기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한 편의 새로운 글은 천행(天幸)의 소치라고 여기자. ⑥글쓰기는 ‘길 없는 길’을 찾는 끝없는 공부다. 겸손하게 평생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자. ⑦몸 사람으로 사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 이전에 오는 것을 놓치지 말고, 특히 감각적 차원에서 인생에 대한 과장된 느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자.

위와 같은 내용들을 공부하는 가운데 인상 깊게 읽은 카프카의 짧은 글이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콘도르 독수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나의 두 발을 쪼았다. 장화와 양말은 벌써 헤쳤고, 이제는 어느덧 발 자체를 쪼아댔다. 늘 덤벼들었다가는 몇 번씩 불안하게 내 주위를 날았다가는 또 쪼아대기를 계속하곤 했다. 어떤 신사가 지나가다가 잠시 보더니 왜 콘도르 독수리한테 당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걸요」하고 내가 말했다. 「저놈이 와서 쪼아대기 시작했는데, 저는 물론 쫓아버리려 했고 심지어 저놈의 목을 조르려고도 해봤지만 저런 동물은 워낙 힘이 세고, 제 얼굴에까지 뛰어들려고 해서 차라리 발을 내준 겁니다. 이제 발이 벌써 거진 짓찧겼습니다」「당신이 저렇게 고통을 당하다니」하고 그 신사는 말했다. 「한 방이면 콘도르 독수리는 처치될 텐데」「그렇습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좋습니다」하고 그 신사가 말했다. <중략> 대화를 하는 동안 콘도르 독수리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들었으며 나와 그 신사에게 번갈아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놈이 모든 말을 알아들었음을 알았고, 그것은 날아올라, 몸을 뒤로 한껏 젖혀 충분한 곡선을 그리더니 창을 던지는 사람처럼 그 부리를 곧장 나의 입을 거쳐 내 몸 깊숙이 찔러 넣었다. 뒤로 넘어지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모든 심연을 채우고 모든 강둑을 넘쳐흐르는 나의 핏속에서 그놈이 구제 불가능하게 익사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전영애 옮김), 「콘도르 독수리」>

‘콘도르 독수리’는 상징으로 사용된 말이기 때문에 개념적 사유를 앞세운 몇 마디의 단어나 문장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기 전에 그것을 처치하는 방법, 혹은 그것이 소멸하는 과정에 우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내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결 방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카프카는 강조합니다. 그 다음은 그것이 사멸(死滅)되고 난 다음의 느낌입니다. 카프카는 ‘해방감을 느꼈다’라고 적습니다. 그 느낌은 ‘모든 심연을 채우고 모든 강둑을 넘쳐흐르는’ 충만감이기도 하다고 카프카는 덧붙입니다. 아마 모든 것을 놓아버린 뒤의 ‘밑이 확하고 빠지는’ 느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글을 같이 읽고 제가 덧붙인 말은 간단했습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군요. 우리도 각자의 콘도르 독수리 한 마리씩은 꼭 삼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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