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서린 세개의 못에 신령스런 글자로 이름표 아로새기다
가장 오래된 서체 전서로 쓰여진'용추'
장소에 신성 부여하고 복을 기원한 듯

경북일보가 ‘금석문(金石文)’을 연재한다. 금석문은 말 그대로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나눈다. 금문은 금속제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범종 등에 새겨진 문자다. 석문은 석제의 비(碑)·묘지(墓誌)·바위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금석문은 정확한 문헌이 적은 고대사의 해명에 기여하고 때로는 문헌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경북일보가 ‘금석문’을 연재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지역의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정리하는 것 자체로도 뜻깊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또한 풍화에 의해 마모 되거나 유실되는 등 흔적이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서 현 시점의 문자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경북일보는 금석학을 오래 천착해 온 진복규 서예가의 ‘금석문’ 연재를 시작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조언을 당부한다. <편집자>

내연산 관음폭포(중용추).
내연산 관음폭포(중용추).

△용추 바위 글씨에 꽂히다

용추(龍湫)는 용이 서린 못을 뜻한다. 전국에 용추가 90여 개 산재해 있다는데 실제는 훨씬 많을 것이다. 포항 내연산에도 용추가 있다. 세 곳이 잇달아 있어 삼용추라 불린다.

용추 글씨는 내연산 삼용추를 증언하는 구체적인 문화유적이다. 이는 인문학적으로나 문화재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미 내연산의 빼어난 경관과 역사적으로 어울린 수많은 선인의 자취는 많은 이에게 관심을 불러왔다. 포항지역의 박창원·김희준 선생은 오래전부터 이런 중요성을 알고 자세하게 연구한 끝에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를 포항문화원에서 출간했다. 뜻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한 안내가 된다. 이 글도 거기에 힘입은 바 크다.
 

다리 시작점 왼쪽에 첫 용추 바위(①), 다리 끝나는 지점 오른쪽에 둘째 추 바위(②), 그 오른쪽에는 셋째 용추 바위(③) 글씨가 있다.

△삼용추 가는 길

보경사 담을 끼고 계곡 쪽으로 걸어가다 본사 구역이 끝날 즈음, 계곡 건너 서운암이 보인다. 산비탈과 계곡을 끼고 줄곧 40분 정도 오르면, 계곡을 건너야 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이 두 갈래 쌍폭이 떨어지는 관음폭포다. 계곡을 건너가기 전, 왼쪽 아래 보이는 폭포가 낙차가 크지 않는 무풍폭포이고, 더 아래쪽 기다란 물줄기는 하용추폭포인 잠룡폭포다. 관음폭포는 중용추폭포인데, 그 앞에 세 개의 용추 바위 글씨가 있다.
 

첫째 용추 바위 글씨.

△관음폭포 앞에서 만난 용추 글씨

처음 만나는 용추 바위 글씨는 계곡을 건너기 위해 만든 나직한 다리 시작점 왼쪽에 있다. 사각뿔 모양의 바위 사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보이는 두 면에 사람들의 이름이 선명하다. 어사 이도재, 최윤석, 조창호라는 이름이 한 면에, 다른 면에는 임학규, 권우규, 권병추라고 정자(해서)로 새겨져 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쪽에서 보이는 두 면에는 각각 한 자씩 용자와 추자를 새겼다. 바로 첫 용추 바위 글씨이다. 왼쪽 면에 알아보기 어려운 전서로 용 룡자를, 오른쪽 면에 못 추자를 뚜렷하게 새겼다. 오랜 세월 거센 계곡의 물결과 바위에 부딪혀 새김이 얕아졌다.
 

둘째 추 바위 글씨.

다리가 끝나는 곳 오른편에는 용자는 없고 추자만 남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닳아서 선뜻 찾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용자를 새기지 않았는지 다른 곳 어디에 새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추자만 확인된다. 예나 지금이나 유산객이 너무 많아 중용추엔 용이 사라졌나 보다.
 

셋째 용추 바위 글씨.

다리를 건넌 쪽에서 못 쪽으로 가면 매우 큰 바위가 있다. 앞뒤 양면에 많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를 비롯해 그들을 수행했던 관리는 물론, 기녀의 이름까지 있다. 이 바위의 윗면에 또 용추 바위 글씨가 있다. 처음 본 용추 바위 글씨와 반대로 여기는 용추 글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새겨져 있다.

△서예로 본 용추

세 곳 중에 두 개의 바위 글씨에 보이는 용자는 결구와 서풍이 같다. 1988년부터 이 글자의 유래와 근거가 무엇인지 찾았지만, 아직 완벽한 답은 얻지 못했다. 선인들이 오래전부터 용추라 불렀으니 당연히 용추일 것이다. 시간을 두고 자료를 찾다 보니 용추로 추정할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용 룡자 오른쪽 부분의 오래된 글자로 볼 수도 있고, 오래된 전서로 추정할 수도 있다.

서예에 있어 낱글자의 짜임을 결구라고 한다. 단어나 문장으로 이뤄진 작품 전체의 어울림은 장법이라 한다. 한자는 외형적 글자꼴의 차이를 따라 다섯 가지 서체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을 오체라 한다. 바로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와 초서이다. 그중 전서는 가장 오래된 서체로 그림문자의 원형을 갖고 있다. 같은 서체 안에서 시대적 흐름의 차이나, 개인적 성향의 차이로 오는 특징을 서풍이라 한다. 이를 미술사의 틀에 견주면, 서체는 형식으로 서풍은 양식으로 볼 수 있다.
 

포항 내연산 삼용추 바위 글씨. 왼쪽부터 첫 바위 글씨 용추(龍湫) , 가운데 둘째 바위 글씨 추(湫)자, 다음이 셋째 바위 글씨 추(湫), 용(龍).

내연산 삼용추에서 첫 용추 바위 글씨와 셋째 바위 글씨는, 서체와 서풍과 결구가 같고 장법이 다르다. 그러나 둘째 바위 글씨의 추자는 다른 바위 글씨와 서체와 서풍은 같지만, 결구가 다르다. 못 추자는 왼쪽 삼수변과 오른쪽 가을 추로 나눌 수 있다. 삼수는 곧 물 수자로 못 추자의 뜻 부분이며, 가을 추자는 음 부분의 역할을 한다. 가을 추 부분을 다시 나누면, 벼 화자와 불 화자가 된다. 삼용추 바위 글씨에서 못 추자는 이 세 부분이 위치 이동을 하며 결구를 달리한다. 이 세 곳의 전서는 모두 비슷한 서풍이다. 서체와 서풍이 같다는 말은, 같은 시대 동일인의 솜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심능준 등 이름 글씨.

△전서(篆書)로 새긴 까닭은

내연산 계곡에 새겨진 바위 글씨 가운데, 전서로 된 것은 용추와 관음폭 앞 바위 뒷면에 새겨진 심능준 이름밖에 없다. 거의 모든 이름은 반듯한 해서(楷書)로 써서 새겼는데, 동영장이라는 심능준의 벼슬과 기녀 달섬의 소속과 이름, 연산폭포로 가는 현수교 시작점의 오른쪽 석벽에 새겨진 관찰사 이존수 등 몇몇 경우만 예서로 새겨져 있다. 행서풍의 글씨도 조금 보이는데 다녀간 시기를 기록한 바위 글씨에 있다.

굳이 전서로 써서 새긴 까닭은 무엇일까? 전서는 가장 오래된 서체로 동아시아 고대 사회에서 신과 교통하는 문자였다. 통치자가 신에게 묻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절대적인 신성과 권위의 서체였다. 신성과 주술성이 부여된 글자이던 것이다. 비석 제목인 비액 글씨와 이름자를 새긴 인장에 전서를 가장 많이 써 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인장이나 비석의 주인공이 길이 복을 받고 신성하리란 생각에서였다. 용추도 마찬가지다. 그 장소에 신성을 부여하고 복되리란 믿음과 기원에서다. 특히 용자는 그 유래와 근거를 찾기 어려운 글자다. 신령함을 더하려고, 선인들이 고심하여 고대 전서를 빌려와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진복규 박사 △영남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졸 △경주대 대학원 ‘최치원 서예 연구’ 박사학위 취득 △경주문화연구 제9집 ‘태종무열왕릉비 비액연구’ △경상북도미술대전, 대한민국서예대전 등 다수입상 △현재 포항중앙고 교사

△내연산 계곡의 상징인 용추

삼용추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내연산 십이폭포 중에 용이 머무는 못이 세 개나 잇달아 있는 곳으로 신령한 대상이었다. 여기에 이름만큼 신비에 싸인 바위 글씨가 용추로 불린 역사와 더불어 남아 있다. 이 글씨는 언제 누가 써서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내연산 삼용추의 대표적 상징이다. 수많은 용추 중 삼용추가 있는 곳이 드물고, 용추라는 전서 바위 글씨가 남은 곳은 더욱 희귀하다. 일찍이 계곡의 이름을 용추라 하여 커다랗게 새겼으니, 건물의 이름을 걸어놓은 편액에 족히 견줄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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