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나에게는 아주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1953년에 초등(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운동장에서 전사한 국군용사들의 화장한 유골함 전달식을 보았고, 삼촌의 유골함을 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할머니와 젊은 숙모, 어머니의 모습을 그저 멀거니 보고 서 있었던 기억도 부끄럽고, 폭격으로 학교 건물의 지붕이 날아간 맨봉당에 앉아서 공부하면서도 즐겁기만 했던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했구나 싶다. 3학년이 되어서 처음 마룻바닥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학령 아동보다 몇 살씩 많은 형들이나 누나들과 동급생이 되어 함께 공부했었고, 그들에 비해 바보짓도 많이 한 것 같다. 손등과 소맷자락에는 늘 코가 번들거렸고, 훌쩍거리며 코를 들여 마신 기억이 지금도 부끄럽다.

초등 3학년 때 여름이다. 우리 분단이 청소 당번이라서 10여 명이 책상을 옮기고 바닥을 쓸고, 양초나 활석(滑石)을 문질러 광을 내고 매끄럽게 만들었었다. 청소 도중 느닷없이 방귀가 나와 뀌었더니 변이 찔끔 따라 나온 것이다. 얼른 변소에 가서 처리를 하고 왔는데 냄새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 악동 친구가 내 뒤에 따라다니며 “누구 똥 지렸다. 냄새야! 누구는 똥도 못 가린다” 놀려대었다. 얼굴이 벌겋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나이가 4살 많은 친구가 와서 나의 고무줄 넣은 삼베 잠방이를 당겨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방구냄새가 좀 심했나 보다. 친구 놀리지 말고 청소나 하자”로 마무리 지어 주어 모면한 적이 있었다. 그 동급생이지만 형뻘이었던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난처한 처지를 마무리 지어 준 친구, 나보다 4살이나 더 많았던 형 같았던 친구였었는데 5년 뒤 장질부사(장티푸스)를 앓다 죽었다. ‘날수 많은 병’으로 알려졌었는데 그 병은 한창 아플 때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지만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회복기에 음식이 갑자기 당기고 그걸 참지 못하고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 형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남몰래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참 도량이 넓어 보였고, 듬직하여 의지하고 싶었던 형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인 처녀 선생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이 가끔 생각난다. 어쩌다 방귀를 소리 내어 뀌고 나면 가족이 “똥을 싸고 있네”라고 놀린다. 얼굴이 붉어진다. 그때의 부끄러움이 생생히 살아난다. 그리고 일찍 세상을 하직한 네 살이나 많았던 그 듬직한 형이 생각난다. 네 살이 더 많다고 해도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그 나이에 일을 너그럽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 어린 친구의 입장이 난처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는지 궁금해진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도량(度量)은 타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을 궁지에 잘 몰아넣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지도자로 군림하는 세상을 보면서 공자나 맹자보다 초등학교 시절 그 형이 생각나곤 한다.

복부인은 아파트 분양 광고만 보면 청약하고 싶어 하고, 등산가는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산만 보면 오르고 싶어 한다. 이념주의자는 나의 이념은 무조건 맞고 남의 사상은 절대로 틀린다고 악착같이 주장한다. 선거만 있으면 출마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고치기 힘든 병이라고 한다. 이념주의자가 선거 병에 걸리고 높은 자리에 앉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부끄러움이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다.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