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28.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
[우리동네 이야기] 28.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
  • 이상만 기자
  • 승인 2021년 04월 04일 20시 04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4월 05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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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지혜·의지 담긴 '말 무덤'에 미움·원망·비방 묻었다
경북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전경. 이 마을에는 14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상만 기자
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소리가 지천에서 들려오고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 우리의 눈을 맑게 하는 꽃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봄의 정취와 함께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말(言)에 대한 교훈을 주는 대표적인 마을이 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400~500년 전 만들어진(추정) 타는 말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말(言)을 묻은 무덤 (言塚·언총) 이 있다.
마을 입구의 대죽리 명소를 알리는 안내도
예천에서 신도시 호명면을 지나 안동시의 구담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보면 대죽리는 아담하고 고즈넉한 조용한 마을이다. 외부인의 발길을 재촉해서 오란 듯 마을 입구는 단정하게 꾸며져 있어 여느 고향 집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선비들이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절개를 지키며 은둔한 곳이다.

대죽리에는 매죽헌, 퇴계 이황 외가터, 만죽정, 유일한 박사 생가, 영모정, 쌍효각, 쌍호재각 등이 있다.

이곳은 퇴계 이황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이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황의 외조부는 지보면 대죽리 출신 춘천 박 씨 박치(朴緇)이다. 자는 현명이다. 후손은 상주시 사벌면에 많다.
유일한 박사의 생가. 이상만 기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개립(1546년 ~1625년)과 죽림 권산해(1403~1456)의 고향이기도 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기업인들의 모범이 되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생가가 있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과 학교재단 유한재단을 설립했다. 기업을 운영하며 얻은 이익을 인재 양성 및 교육 사업에 투자했고,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말무덤의 정자에서 바라본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마을 전경. 이상만 기자
△ 선현들의 지혜를 오롯이 품고 있는 땅 ‘대죽리’.

대죽리는 남으로 길게 흘러내린 낮은 언덕배기 논밭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로 갈라진다. 이곳에 말 무덤이 있다.

이 마을에는 춘천박씨·김녕김·밀양박·김해김·진주류·경주최·인천채씨 등 많은 성씨들이 살았는데 문중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등 말썽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기에 골몰했다. 어느 날 한 과객이 이 마을을 지나다 산의 형세를 보고는 “좌청룡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어 위턱의 형세라 마치 개가 짖어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이 항상 시끄럽다”며 예방책을 일러주고 떠났다.

대죽리를 둘러싸고 있는 야산은 그 형세가 마치 개가 입을 벌리는 듯해 ‘주둥개산’이라 불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과객의 말에 따라 개 주둥이의 송곳니 위치인 논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 세 개를 세우고, 개의 앞니 위치인 마을 길 입구에는 바위 두 개로 재갈 바위를 세웠다.
대죽리 마을의 말 무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말 많은 인간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참고 절제하려는 지혜와 의지의 소산이다. 이상만 기자
그리고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사발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주둥개산에 큰 구덩이를 파놓고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비방과 욕을 모두 각자의 사발에 뱉어놓으라”고 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말(言)들을 사발에 담아 깊이 묻은 말 무덤을 만든 것이다. 이런 처방이 있는 뒤부터 싸움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말(言)무덤(言塚.언총).이상만 기자
‘구화지문, 설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입은 재앙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뜻이다.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고, 평생 잊지 못할 희망을 주기도 한다.

대죽리 마을의 말 무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말 많은 인간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참고 절제하려는 지혜와 의지의 소산이다.

대죽리 마을은 토양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고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배산임수를 갖춘 명당이다.
말무덤 주변돌에 새겨진 글귀.
대죽리가 속한 지보면의 사람들은 기가 세다. 선현 때부터 내려온 그 강한 기로 학자와 관인, 선비, 우국지사 등 유명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정사(鄭賜1400~1453), 정사용(호음·1491~1570),국문학의 태두 조남제 박사(1904~1976)를 비롯한 현석호 전 국방부 장관, 유학선 전 장군 등 많은 정치·경제·장성의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본디 대죽리(한대)는 용궁현으로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암천리 일부를 병합해 대죽리라고 했다.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십명지로 전해 오는 마을이다. 봉 두령을 주봉으로 남쪽에 원방산이 있고, 동쪽은 주등포산 이 좌청룡을, 서쪽은 앞 남산이 우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삼태기 형으로 된 정남향의 아늑한 마을이다. 현재 대죽리에 사는 주민은 146명이다. 면적은 3.04㎢이다.

대죽리에 사는 유일한 박사의 일가 친척인 유승대(81)씨는 “유씨 성을 가진 주민이 20여 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다 떠나가고 4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며 “우리 동네는 퇴계 이황 선생의 외가 터가 있고 유일한 박사의 생가, 말(言) 무덤 등이 있어 유명관광지는 아니지만, 간간이 찾아오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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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지방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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