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979년 5월에 집권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총리는 그야말로 처참하고 암울한 처지에 놓인 국가를 전임 노동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았다. 1978년-1979년의 소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동안 영국의 강성노조가 수십 퍼센트의 임금인상률을 요구하며 광범위한 파업에 돌입하자 영국 길거리에는 수거하지 않는 쓰레기가 즐비하였고, 병원 영안실에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시체가 쌓여갔으며, 수백 군데의 학교가 문을 닫았다. 잦은 파업으로 인한 막대한 근로손실 일수로 인해 영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1970년대 말의 영국 실업자 수는 백오십만 명에 이르렀고, 인플레이션은 최대 25%로 치솟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막강노조의 거침없는 폭주에 사회가 맥없이 휘청거리는 ‘영국병(British Disease)’에 단단히 걸린 이 섬나라에게 세계는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라는 오명을 붙여주었다.

경기 불황 때에 국가의 재정 지출을 확대해 소득을 늘려 소비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케인스주의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은 전후(戰後) 영국 경제 정책의 근간을 이루어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퍼주기’ 방식으로는 영국 경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대처는 케인스주의를 과감하게 버리고, 그 대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하여 세수 증가 및 금리 인상을 통해 시중의 통화량을 줄이는 통화주의(monetarist)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줄어들었으나 국가의 재정보조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웠던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면서 영국 실업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에 보수당 내부에서도 대처의 ‘매정한’ 정책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고, 급기야 1981년 3월에는 364명의 경제학자들이 영국의 주요 일간지에 공개서한을 실어 대처 정부가 하루빨리 케인스주의로 회귀(回歸), 즉 유턴(U-turn)을 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안팎으로부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자신의 신념과 직관을 꺾지 않았다. 1980년 10월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대처는 ‘언론에서 애용하는 구호인 “유턴”이 나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제가 할 말은 이뿐입니다. 유(you)가 원하면 유(you)나 턴(turn)하세요. 저는 회귀하지 않습니다’라는 연설을 남기면서 정부 기능의 축소와 규제의 완화, 개인의 자유 극대화, 자유시장주의의 안착, 사회복지의 구조조정, 공기업의 민영화, 노조의 무력화, 대규모 해외투자의 유치 등을 지향한 소위 ‘대처 혁명(Thatcherite Revolution)’을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저돌적으로 추진하였다.

마가렛 대처의 11년 반 통치가 영국 사회에 남긴 유산만큼 그 평가가 하늘땅 차이로 갈리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사안도 드물 것이다. 대처 혁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비효율적 산업들이 정리되며 런던의 금융업이 크게 성장하는 등 영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강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나, 낙후 지역의 경제 초토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으로 인한 빈곤의 고통을 겪으면서 영국의 빈부 격차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나 대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든 영국인들이 그녀에 대해 인정하는 한 가지는 불리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낸 대처의 뚝심과 의지력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고 심지어 증오하는 상대방이라고 해도 그에게 자신의 원칙과 신념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있다면 그 진정성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에서 당장 불리하다고 해서 지금까지 막무가내로 추진해 온 모든 일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부정하고 악어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읍소한 줏대없는 위정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이들을 사회의 리더로 앞으로도 믿고 따라야 하는 우리 국민은 얼마나 불쌍하고 운 없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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