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을 솟게하고 동해를 기울어지게 해 가뭄을 해소하다

대현스님이 거주했다는 용장사지 3층석탑,

『삼국유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현유가해화엄(賢瑜伽海華嚴)’조를 들겠다. 유가종의 대표선수 대현과 화엄종의 대표선수 법해의 법력 대결을 판타지 소설 쓰듯, 중계방송하듯 기록해 놓은 대목이다. 읽는 이가 상상력의 도움을 조금만 더 받으면 무협소설이나 활극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까지 연출이 가능할 정도다.

삼륜대좌불.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유가종은 법상종의 다른 이름이다. 대현은 법상종의 비조라 불리는 고승으로 남산 용장사에 거주했다. 해발 300m 금오봉 8부 능선에 있는 용장사지는 아직까지 탑과 미륵보살 좌대가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 장륙상이 있는데 대현이 불상을 돌면 불상도 대현을 따라가며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대현은 50여 종의 유식학 저술을 남겨 원효, 경흥스님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꼽힌다. 당나라의 도봉은 대현을 일컬어 500년 만에 출현한 성인이라고 했다.

법해는 화엄종의 승려라는 사실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아 법력을 펼쳤고 법력을 본 왕이 일어나 절을 할 정도로 존경을 표했다면 신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스님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 심초석.

두 스님의 매치는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때 753년과 754년 두 해에 걸쳐 펼쳐졌다. 대결에 먼저 초청된 이는 대현이다. 753년 여름 가뭄이 들어 왕궁의 우물이 말랐다. 왕이 법상종의 고승 대현 스님을 내전으로 초청해 비를 빌게 했다. 왕은 ‘금광경(金光經)’을 독경해달라고 콕집어 요구했다. 『삼국유사』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753년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경덕왕이 대현을 내전으로 불러 금광경(金光經)을 강연해 비를 내리게 하라고 했다. 하루는 재를 올리는데 바리때를 펴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정화수를 가져오지 않았다. 담당관리가 나무라자 ‘궁궐의 우물이 말라 멀리서 길어 오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대현이 듣더니 ‘어찌하여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한 뒤 강연하면서 향로를 가만히 받들었다. 잠시 후 우물물이 솟아오르는데 높이가 7여 장이나 되어 절의 깃대와 나란히 했다. 온 궁궐이 놀랐다.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경덕왕은 이듬해인 754년 여름에 법해스님을 황룡사로 불러 ‘화엄경’을 강연케 했다. 다시 『삼국유사』 기록이 길어 줄여 쓴다.

“왕이 법해에게 낮은 목소리로 도발한다. ‘지난여름에 대현법사가 ‘금광경’을 강연하였더니 우물물이 7장이나 솟았는데 그대는 어떤 법력을 가지고 있는가’ 법해는 바다를 기울여 동악(東岳, 토함산)을 치우고 서울을 떠내려 보낼 수도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뒤 궁궐의 동쪽 연못이 넘쳐 내전 50여 칸이 떠내려갔는데 법해는 ‘동해를 기울이려고 하다 보니 수맥이 먼저 불어났을 뿐’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왕은 일어나 법해에게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에서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 불전의 계단 앞까지 이르렀다가 포시(오후 3~5시)에 물러갔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이 그를 더욱 믿고 공경하였다.”

이 배틀의 승자는 법해가 됐다. 대현이 우물물을 7장 높이로 치솟게 한 데 반해 법해는 바닷물을 기울였다. 우물 안 개구리와 바다 용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을 역사학자 김상현은 ‘유가종의 대현이 보여준 법력보다 화엄종의 법해가 보여준 법력이 더 뛰어난 것으로 강조되고 있어 경덕왕대 화엄종의 우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설화’로 이해하기도 했다. 경덕왕이 법해의 법력을 본 뒤 법해에게 절하고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는 대목은 곱씹어볼 만하다. 왕은 법상종 진표와 대현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던 화엄종을 견제하려 했으나 법해를 만난 뒤 생각을 바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엄의 영향력은 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막강했고 두터웠을 것이다.

황룡사지 역사문화관.

실제로 이 배틀은 법상종과 화엄종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였을 수도 있다. 신라 법상종의 뿌리는 원측이고 화엄종의 개조는 의상이다. 왕손으로 알려진 원측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현장법사의 제자로 중국 법상종의 종통을 이어받았다. 중국어 범어 서장어 등 6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측천무후가 집권했을 당시 측천무후로부터 생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효소왕 재위시에 신라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모량부 사람으로 하급관리인 아간 익선이 통일영웅 죽지랑의 부하 득오를 제마음대로 데려다가 밭일을 시켰던 것이다. 죽지랑이 찾아가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자 익선은 몇 번을 거절하다 뇌물을 받고 득오의 휴가를 허락해줬다. 이 사실을 안 왕이 모량부 출신 관리를 모두 쫓아내고 다시는 관직에 들지 못하게 했다. 승려가 되려는 자는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이미 승려가 된 사람은 종과 북이 있는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원측은 해동의 고승으로 이름나 있었지만 모량부 사람이었기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원측은 이때 당나라로 돌아가 다시는 신라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 큰 스님으로 추앙받았다.

황룡사지역사문화관에 있는 황룡사 9층목탑 모형.

반면 원측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의상은 탄탄대로를 걸었다.그는 중국에서 화엄종의 2조인 지엄에게서 수학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화엄종의 개조가 됐다. 부석사 화엄사 법어사 불영사 등 화엄십찰을 건립했다. 당나라에서 돌아와 당나라의 신라 침략 소식을 문무왕에게 전했고 이후 문무왕에게 국정 운영 방안에 대한 조언을 하는 등 실세로 부상했다. 화엄종이 신라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불려 나갔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때에 경덕왕 법상종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정치행위를 했다. 753년 봄 왕은 법상종의 진표가 강릉에서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와 자라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계를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초청해 보살계를 받았다. 그런 뒤 같은 해 여름에 가뭄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법상종의 대현스님을 왕궁으로 초청했다. 같은 해 봄 여름에 법상종파 스님을 잇따라 초청해 대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의상 이후 신라 불교의 한가운데 있었던 화엄종파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경덕왕대에도 치세가 불안했다. 가뭄이 잦았고 폭풍이 불어 나무뿌리가 뽑히는 등 기상이 악화가 잦았다. 천재지변을왕의 덕, 통치능력으로 보던 시대였다. 일본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으며 당나라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정국이 불안했다. 특히 법해에게 강연을 요청한 시기에는 서울에 계란만한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그런데 법상종 진표와 대현을 초청한 일이 화엄종 대덕들을 자극했다면?

경덕왕은 결국 다음 해에 법해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법력을 과장해 그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배틀이 끝난 뒤부터는 삼국유사에서 법상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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