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래된 마을이나 고택에 가면 지금은 쓰지 않는 옛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보통은 뚜껑이 덮어져 있습니다. 간혹 그런 닫혀있는 옛우물을 만나면 우정 뚜껑을 열어봅니다. 저 깊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오래된 물냄새를 맡아보고 싶어서입니다. 마치 목구멍 저 안쪽에서 올라오는 나도 모르는 내 속 냄새 같은 게 훅하고 올라옵니다. 저는 그 오래된 검은 물냄새가 좋습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둠의 배경도 좋고요. 언제부터, 왜 그런 (악)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젊어서 고택탐방을 가금씩 하던 때 생긴 것 같습니다. 무언가 어릴 때의 기억(정서)을 리바이벌 시켜주는 무의식적인 매듭(연결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감각(후각과 시각)은 누군가가 보낸 전령사입니다. 이를테면 제 콤플렉스가 그렇게 밖에서 자기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종의 숨은그림 찾기 행사인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말들을 합니다만 평균적 인간들의 콤플렉스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콤플렉스라는 말은 본디 ‘복잡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열등감과 모성애 결핍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화 과정에서 겪는 (당연한) 실패가 열등감의 원천이기 때문에 자기실현(학업이나 직업, 취미생활 등)에 몰두하다 보면 그쪽 콤플렉스는 자연스럽게 완화가 됩니다. 어려운 점은 모성콤플렉스 쪽에서 더 많이 발견됩니다. 넘치게 받아도 문제고 부족하게 받아도 문제인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마보이’를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나 간섭을 받으며 자란 아들의 경우(혹은 여성화된 남성)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합니다만 심리학적으로는 그렇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지나친 모성콤플렉스로 인해 평균적인(정상적인) 이성애(異性愛)에 실패하는 남성들이 진정한 마마보이입니다. 무의식에 고착된 절대화되고 이상화된 어머니상(Mother-Figure)이 지상의 모든 사랑을 방해합니다. 마마보이들은 자신을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의 아들 연인(Son Lover)으로 치부합니다. 물론 무의식 차원에서이지요. 이쪽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아들 쪽에서의 피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 반대쪽에서 마찬가지고요. 오정희 소설 ‘옛우물’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그 여름, 나를 찾아온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허둥대는 어미의 기색을 본능적으로 느낀 아이는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진저리를 치며 물어뜯었다. 이가 돋기 시작한 아이의 무는 힘은 무서웠다. 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불에 덴 듯 울어대는 아이를 떼어놓자 젖꼭지 잘려 나간 듯한 아픔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이의 입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브래지어 속에 거즈를 넣어 흐르는 피를 막으며 나는 절박한 불안에 우는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와 함께 강을 건너 깊은 계곡을 타고 오래된 절을 찾아갔다. 여름 한낮, 천 년의 세월로 퇴락한 절 마당에는 영산홍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영산홍 붉은 빛은 지옥까지 가닿는다고, 꽃빛에 눈부셔하며 그가 말했다. 지옥까지 가겠노라고, 빛과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더러운 간이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브래지어 속을 열어 보았다. 피와 젖이 엉겨 달라붙은 거즈를 들추자 날카롭게 박힌 두 개의 잇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돌연 메스꺼움을 느끼며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였다.(오정희, 「옛우물」)


오정희 소설에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옛우물’은 그 시리즈물의 대단원쯤에 놓이는 작품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 연인’들에게 보내는 옐로우 카드라고도 볼 수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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