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최근에 영화배우 윤여정씨가 제74회 영국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면서 ‘모든 상이 의미가 있지만, 이 상은 특히 콧대 높은(snobbish)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좋은 배우라고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 기쁘다’라는 말로 자신의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에 대해 영국 영화감독 에드가 라이트(Edgar Wright)는 ‘그 발언으로 윤여정은 전체 시상식 시즌에서 우승했다’라며 극찬하였고, 또 한 명의 영국 시청자는 ‘시상식 보러 텔레비전을 딱 2분 켰는데 윤여정이 영국인들을 “콧대 높다”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코멘트를 남기는 등 대체적으로 유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화제가 된 단어 ‘snobbish’는 한국 언론 매체에서 ‘콧대 높은’, ‘잰 체하는’, ‘고상한 체하는’, ‘속물적인’ 등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러나 사실 영국인들이 누구를 ‘snobbish’하다고 표현할 때는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놓고 경멸하고 깔본다’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결국 윤씨는 영국인들의 행사에서 영국인들의 면전에 대고 ‘영국인들은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대놓고 경멸하고 깔본다’라는 조크를 한 셈이다. 한국에서야 유명인이지만 영국에서는 이번에 거의 처음 들어보았을 이 동양인 여배우가 대놓고 한 국가의 국민들을 싸잡아 요즘 말로 슬쩍 ‘디스(dis, 폄하)’한 상황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오히려 윤씨가 ‘최고의 찬사’를 했다며 웃어넘긴 것이다.

초등학교 유년 시절과 대학원 유학 시절을 영국에서 보낸 필자가 영국인들을 만나고 영국 문화를 접하면서 가장 희한하게 생각한 점은 바로 영국인들이 ‘자기 비하’와 ‘셀프 희화화’를 즐겨 한다는 것이다. 영국 시트콤이나 게임쇼 등을 보면 ‘와, 돈을 많이 밝히는 친구네. 스코틀랜드 출신인가보지?’라던가 ‘난 리버풀(Liverpool) 축구팀 팬이랑은 죽어도 결혼 못해!’와 같은 영국 내 특정 지역 또는 특정 단체를 비하하는 대사라든지, ‘영국 상류층은 하도 자기들끼리 근친결혼을 해서 몸에 성한 곳이 없다’와 같은 영국의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농담 등이 난무한다. 이런 말들을 스코틀랜드인이나 리버풀 팬이나 영국 상류층 사람이 들었다면 엄청 분노하고 치를 떨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앞장서서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들끼리의 ‘셀프디스’는 물론, 심지어 외국인이 자기들을 ‘디스’하는 것을 영국인들이 용인하고 심지어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이를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다름 아닌 그들의 ‘여유’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영국인들의 특징을 잡아내어 놀리고 비웃는다 하더라도 영국인들이 이에 상처받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인류 사회와 문화의 형성에 영국이 기여한 부분이 크다는 자부심과 자신감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 영어, 영국공영방송(BBC),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셰익스피어, 처칠, 셜록 홈즈, 해리 포터, 윈저(Windsor) 왕가 등이 존재하는 한 영국인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낄 이유가 없고, 콤플렉스가 없으므로 당연히 ‘디스’에 대한 느긋한 여유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외국인 배우가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 시상식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한국인들에게 상을 받아 기분 좋다’라고 소감을 밝힌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과연 우리는 윤여정씨의 소감을 들은 영국인들처럼 과연 웃어넘길 수 있을까? 우리는 ‘최고의 찬사’로 칭송해 줄 수 있는 대범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과연 보일 수 있을까? 우리를 ‘디스’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를 ‘디스’하는 다른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존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는 날은 과연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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