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이 빚은 바위 곡선과 푸른 물결, 조선 선비들 핫플레이스

甲寅(1734)秋 鄭敾 탁본, 피우석 웅덩이 위에 있음.

△삼용추의 가장 오래된 기록

지금까지 찾은 문헌 가운데 내연산 삼용추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것은, 조선시대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청하현 산천 조 신구산 항목에 삼용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구산은 청하현의 북쪽 십 리에 위치한다. 삼용추가 있는데, 가뭄에 기도하면 응험(應驗)이 있다.(神龜山 在縣北十里 有三龍湫 旱禱在應)”고 하였다.

신구산은 지금의 내연산 계곡 오른쪽 산으로, 보경사에 있는 ‘원진국사비문’에도 나온다. 이 기록은 지금의 내연산 삼용추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내용은 새로 증보(新增)하기 전에 엮은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실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내연산 삼용추에 대한 공식 기록은 1481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일 것이다. 이는 삼용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런 내용을 책으로 알게 된 지방관들이 내연산과 보경사 등의 빼어난 경치를 답사하고 노래한 시문이 연이어 등장하는데, 구암 이정(1512~1571)의 경우가 그 시작으로 보인다. 구암은 퇴계선생의 제자로 1536년 25세로 문과 별시에 장원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60년부터 1563년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청하현감을 지내고 돌아가던 옹몽진(1518~1584)이 구암에게 내연산의 빼어난 경치를 전했다고 한다.

정선, 무송관삼용추도. 선면 지본담채, 38×6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삼용추 폭포 아래에서, 여유롭게 남산을 바라보네.

△삼용추를 노래한 조선시대 문인.

구암 이정 이후 지방관으로 삼용추를 찾아 시문을 남긴 이가 많다. 하수일이 1605년에 경상도도사로, 조태억(1720)과 조인영(1825)과 신석우(1856) 등이 경상도관찰로 부임하여 글을 남겼다. 이정(1560)과 구사맹(1586)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경주부윤으로, 조경(1638)과 성대중(1783)이 흥해군수로, 조유선(1793)이 청하현감으로 와서 시문을 남겼다.

삼용추를 탐방한 문인으로는 황여일(1587), 서사원(1603), 이휘일, 정식, 유도원(1773), 정위, 유휘문(1821), 김대진(1849), 신필흠 등이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지역 출신 문인으로 채구장, 최천익 등도 글을 남겼으며, 보경사의 의민 스님도 비교적 많은 시문을 남겼다. 또 강한 황경원과 여항시인 추재 조수삼도 용추를 읊은 시를 남겼다.

1587년 해월 황여일(1556~1622)이 숙부를 모시고 내연산을 유람하였다. 그 결과물로 산을 유람한 기행문인 ‘유내영산록’을 써서 용추를 비롯한 내연산 일원의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또 용추와 관련된 시도 여럿 남겼다. 뒤이어 1586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팔곡 구사맹(1531~1604)이 황여일의 유산기와 시를 보고 용추폭포를 읊은 시를 3수나 남겼다. 내용으로 보아 용추를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황여일의 유산기는 이후로 꾸준히 내연산을 유람하는 문인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취흘 유숙(1564~1636)은 인조반정에 숙부인 유몽인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연좌되어 1623년에 청하로 유배되었다. 1635년까지 13년 동안 유배당한 처지로 용추는 물론 내연산과 보경사 등을 읊은 시문을 어림잡아 200여 작품 남겼다. 역적으로 몰려 유배 온 처지라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이다. 용추를 비롯한 유배지의 명승을 답사하고 자신의 심사를 거기에 부쳤다. 또 가뭄에 지방관을 대신해 용추에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문을 여러 편 지어 남겼다.

추사의 절친 운석 조인영(1782~1850)은 1825년 경상 감사로 부임하여 용추를 찾았다. 현감에게서 1759년 경상 감사로 용추에 자취를 남긴 조부 조엄(1719~1777)의 인명 각자에 대해 듣고 시를 남겼다. 조부 조엄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도 새겼다. 다음은 내연산 제2수(오언율시)다.

구름과 연무 속 여러 번 묵고(雲烟多宿債)
수령의 임무 다하니 또 가을 산이네(幢節又秋山)
현감은 내 조부께서 남긴 자취 말하며(知縣談吾祖)
새긴 이름 이곳에 있다 하네(題名在此間)
재주 없으니 행적 잇기가 부끄럽고(不才慙繼趾)
할아버지 남긴 자취는 뵙기 황홀하네(遺跡怳承顔)
동남 고을의 일을 기쁘게 아룀은(差喜東南事)
빼어난 풍광만 보고 돌아온 것 아니네(非徒攬勝還)

비하대, 대산 이선생 명명, 강필효 글씨

△바위에 새긴 이름 글씨.

지금까지 내연산 계곡에서 발견된 글씨는 관직과 탐승 시기를 덧붙여 새긴 인명이 대부분이다. 이 중 상당수가 용추 관련 시문을 남겼다. 또 상대적으로 용추 관련 시문을 남겼으나 인명 바위글씨를 남기지 않은 경우도 많아 보인다. 나머지는 전서로 새긴 용추와 연추, 그리고 해서로 새긴 연산폭과 월영대 위의 비하대가 있을 뿐이다. 이들도 그 장소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원진국사비(1224) 부분, 왼쪽 4행. 신구산에 장례를 치르고 탑을 세움(葬于神龜山立塔).

옛사람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은 이유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일까? 아니면 용추의 신성에 기대어 복을 받고 길이 살고자 한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의미일 것이다.

바위글씨 가운데 획이 가장 굵고 깊이 새겨진 것은 관찰사 김양순의 이름이다. 마치 관찰사의 권위를 자획의 크기로 과시하듯 새겼다. 거기에 버금갈 정도로 큰 글씨가 바로 비하대 바위글씨다. 1818년 강필효가 쓴 것으로 전하는 이 글씨는 대부분의 인명 글씨와 같이 해서로 쓰였다.

연산폭, 군수 이종국이 쓴 것일 수도 있다.

퇴계의 적통을 이은 남인계 학자 대산 이상정(1711~1781)은 1754년 3월 연일현감으로 흥해군의 시인 농수 최천익과 보경사의 오암당 스님과 함께 용추 일원을 찾았다. 이때 중허대 혹은 월영대, 기화대로 불리던 연산폭포 왼쪽의 바위 봉우리를 비하대로 이름을 고쳤다. ‘비하(飛下)’는 주자의 축융봉 시나 이백의 여산폭포 시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65년 지난 뒤 이상정의 손자 이병원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여 농수집을 통해 비하대로 이름을 고친 이유를 알았다. 안동 출신의 선비 강필효(1764~1848)를 만나 비하대에 올랐다. 이때 동행한 강필효의 글씨를 받아 석공에게 새기게 하고 함께 유산한 사람들의 이름도 같은 바위 옆면에 새겨 놓았다.
 

내연삼용추도. 지본담채, 134.7×56.2cm, 리움미술관 소장

△겸재가 그려낸 내연산 삼용추

내연산은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그림 때문에 더 널리 알려졌다. 겸재 정선이 1733년 6월에 청하현감으로 영을 받고, 재임 중 1735년 60세 5월 16일 모친이 별세하여 사직한다. 그 사이 갑인년(1734) 가을에 연산폭포(상용추 폭포) 옆 절벽에 ‘갑인추 정선’이라 새겨놓았다. 이때의 작품인지 그 뒤에 재임 중 본 것을 그렸는지 여러 작품을 남겼다.

관아재 조영석, 제화시 부분. 지금 원백(정선)의 붓을 따라, 비로소 내연산을 알게 되었네. 저 세 유산객에 방해되지 않고, 한 번 늙은 나로 볼 수 있게 하네. 이거용을 위해 지어 씀. 종보. 관아재, 백문방인. 산수우, 주문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내연삼용추도’와 같은 화제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작품이 있다. 또 겸재미술관 소장 ‘청하성읍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선면 ‘무송관삼용추도’가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작자미상의 ‘내연산폭포도’와 일본 유현재 소장 작자 미상 ‘청하내연산도’도 폭포가 그려져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진복규 박사(포항중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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