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경관 좋아 은인·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

신원리 마을 전경

봄기운이 만연한 4월 마지막 주말. 기암절벽과 자연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팔공산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고 두 갈래로 갈라진 작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특히 내신리(內新里)와 외신리(外新里) 산에서 시작된 시냇물이 서로 합류해 계곡을 이루며 굽이쳐 흐르고 있다.

옛날부터 여기는 기암절벽 등 자연경관이 좋아 은인(隱人)과 선비들이 즐겨 찾았고 경치 좋고 물이 깨끗해 오곡백과가 풍부한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마을 입구에 소나무들이 서 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는 바쁘게 살아온 삶을 뒤로하고 제2의 인생을 살려는 은퇴자들의 전원주택 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을을 들어서자 좁은 도로 양쪽에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듯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신원리 마을의 역사와 옛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기서 태어나고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보내고 있다는 노기현(78) 노인회장을 만나 함께 마을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이 마을은 돌과 바위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옛말에 논밭을 일구면 크고 작은 돌들이 너무 많이 나와 돌을 팔아 땅을 샀다는 우스개 말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신원은 안신원, 바깥신원, 술래바탕, 광대정 등 7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보 14호인 거조사와 신원재, 조선 영조 때 지어진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을 모시는 불호당(?護當) 등이 있다고 자랑했다.

△국보가 있는 안신원.
신원리 가운데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420여년 전 장경일 이라는 선비가 개척했다. 당시 청통천 상류에 마을을 새롭게 이뤘다하여 신원이라고 불리며 여기에는 그 유명한 국보 제14호인 거조사 영산전이 있는 마을이다.

△술래바탕·수꾸바탕·수수터·중신원.
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들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농사를 지으면 안 되고 수수농사 만이 해마다 풍작을 이루었다고 해 수수란 곡식이름을 따서 일명 수수터라고 불렀다.

또 마을의 위치가 신원리 한가운데이므로 중신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여기가 나라에서 왜적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는 지역순회장이 됐다고 전한다.

동곡 노미옥 선생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돌아올 때 따라온 광대들이 한바탕 놀았던 곳을 광대진, 술래잡기를 하며 떠돌던 곳은 술래바탕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유룡·용란.
지금으로부터 320여년 전에 이곳에서 용이 알을 낳았다고 해 주민들은 이 마을을 용란(龍卵)이라고 부른다.

△광대정(廣大亭).
조선시대 큰 명절날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악귀를 물리치고 그해의 행운과 풍년이 깃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광대놀음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광대놀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조그마한 정자를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없어지면서 훗날 주민들이 즐거웠던 그 당시를 생각하며 마을 이름을 광대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구돋터.
돼지 아홉 마리가 있는 모양이라 하며 이 모양은 일반인은 볼 수 없고 풍수에 밝은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한다.

△새터·신기(新基).
임진왜란 당시 마을이 없어졌다가 1650년경에 다시 마을이 생겨 이름을 새터라 했다.

마을 뒤에 이 마을을 보호하는 듯이 도사리고 있는 큰 바윗돌 한 개가 있다.

거조사 경내 풍경.권오석 기자

△국보 제14호 거조사 영산전.
거조사는 아담한 작은 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느낌의 절로, 입구에는 붉은꽃이 활짝 핀 연산홍이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듯하다.

이곳 거조사(居祖寺)에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로 가장 오래된 영산전(서기 1375년)이 있으며 내부에는 526위의 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거조사 영산전 내에서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물로 은해사 사적비문에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고 해서 거조라 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문헌에는 효성왕 2년(738)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거조사 돌계단.

건물은 잡석이 불규칙하게 축조된 기단 위에 기다랗게 지어졌으며 다포(多包)집과 같은 형태이나 주심포(柱心包)집 양식의 초기적 형태를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근래에는 나한 기도도량으로써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아들고 있다.
 

거조사 삼층석탑.

△ 문화재 자료 제104호 삼층석탑.
이 탑은 화강암으로 높이는 3.15m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몰딩이 표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탑 구조로 불탑 꼭대기에 세워놓은 장식부분이 전실 되었다.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불호당

△서낭신을 모시는 불호당.
거조사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는 마을의 재액을 없애주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서낭신)을 모시며 동제를 지내는 단칸집의 불호당이 있다.

조선 영조 45년(1769)에 창건하고 1901년과 1964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제는 음력 정월 초순에 제주(祭主)를 선정하는데 깨끗한 사람으로 집안에 해산이나 상을 당하지 않으며 연령이 높고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된다.

제주로 선정되면 3일 전부터 대문에 금(禁)줄을 치고 목욕재계하며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하고 매사를 삼가해야 한다.

불호당 앞 고목나무

또 서낭당 주위에도 금줄을 치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한다. 아울러 주위에 황토를 깔아놓는데 붉은 흙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잡귀가 못 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기(祭器)는 새것으로 장만하고 제물을 깨끗한 가게에서 값을 깎지 않고 산다.

정월 14일 저녁부터 제물을 차려 보름날밤 1시에서 2시 사이에 동제를 지내는데 순서는 분향(焚香), 강신(降神), 참신(參神), 헌작(獻爵), 독축(讀祝) 순으로 한다.

이렇게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 후에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는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소원 성취를 빈다.

이 행사는 공동체 의식과 향토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에도 전원주택에 사는 외지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단합이 잘되고 있다.

신원제 재실

△신원재.
조선 세종 때 급제해 이조참의의 벼슬에 오르고 훗날 대재촌에서 당시의 선비 김종직, 서거정, 남효온 등과 성리학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낸 죽재(竹齋) 윤긍(1432~1485)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사이다.
 

노기현 노인회장과 청통면 유석재 산업계장이 마을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노기현 노인회장은 “농촌 마을이 그렇듯이 노인들만 있고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 시대에 자연에서 제2의 인생을 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마을에 생기가 돌아 기쁘다”며 “우리 마을이 후대에도 자연 풍경이 좋고 인심 좋으며 주민들 간에 친목과 단합이 잘 되는 신원리 마을로 남기를 바란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권오석 기자
권오석 기자 osk@kyongbuk.com

영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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