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이수' 김천에서도 솓꼽히는 길지 많은 명헌거유 배출…'조선 8대 명당'

상원마을과 상좌원마을. 김천문화원

예부터 산과 물이 좋아 삼산이수(三山二水) 고장으로 불린 김천은 명산대천 골골이 500여 개에 달하는 마을을 움트게 했고 특히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의 중류에 자리한 상원과 상좌원마을은 조선 8대 명당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길지로 일컬어지며 연안이씨 문중에서 무수한 명현거유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상남도 거창군과의 경계인 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과 황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하원천이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상원리(上院里)는 원터(院基), 마두리(馬斗里), 무티실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원터(院基)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원터, 마두리, 무티실(수도곡)을 합하여 상원리라 하여 석현면이 됐고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이 통합되면서 구성면에 속하게 됐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이 지례면 지품마을로 낙향해 살면서 후손들이 주변 마을로 분가하게 되었는데 이말정의 아들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琡琦)의 차남인 진사 이세칙(李世則)이 원터에 정착해 마을을 개척한 후 대대로 연안이씨 집성촌을 이루어왔다.

상원리에 속한 세 마을 중 원터는 마을 인근에 옛날 상좌원(上佐院)이라는 관용숙소가 있어 원터라 했고 상좌원의 위쪽에 있다 하여 상원(上院)이라 했다.

이 마을은 감천과 하원천의 안쪽에 위치해 지형이 풍수지리로 볼 때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전하는데 마을 중앙에 있었다는 안샘(內泉)이 연꽃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이말정의 묘가 있는 매봉산 조산골은 금비녀가 떨어졌다는 금채낙지형(金釵落地形)으로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연성부원군은 후손 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말정과 곡산한씨의 묘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1446년(세종 28년) 부인 곡산한씨가 별세하자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묘터를 정해주며 땅속에서 석함(石函)이 나오더라도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묘터에서 널찍한 돌이 나왔는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인부가 석함을 열자 벌 두 마리가 날아 나왔는데 이에 스님이 “이 터에서 발복이 3년 이후로 미루어지겠지만 분명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3년 후부터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후손들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통상의 관례와 달리 후손들의 묘가 위에 있는 역장(逆葬)인데 이것과 관련한 전설도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는 원군을 보낼 때 조선의 명당을 훼손해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아볼 요량으로 명나라 군사들이 건널 압록강 임시다리를 관(棺)으로 이어 만들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국의 묘를 파헤쳐 관을 공출해갔는데 이말정의 묘는 역장을 했던 관계로 훼손되는 수난을 면했다고 한다.

상원리에 속한 또 다른 마을인 마두리(馬斗里)는 과거 상좌원이 있을 때 원(院)에 머물던 길손들이 말(馬)을 매어두고 여물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마두리라 했다고 하는데 두릉(杜陵)으로도 불린다.

또 원터 안쪽 수도곡에는 옛날 수두사(水豆寺)라는 절이 있었고 도(道)를 닦았다 하여 수도곡(修道谷)이라 했는데 이것이 뒤에 마을 이름이 되었고 달리 무티실로도 불린다.
 

방초정과 최씨담. 김천문화원

원터마을 입구에는 방초정(芳草亭)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1625년(인조 3년) 이정복(李廷馥)이 자신의 호(號)를 따서 방초정이라 이름하고 원래 지금의 자리보다 감천 쪽으로 더 가깝게 지었었는데 1736년 감천의 범람으로 유실되자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건립했다.

정자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으로 불리는 연못이 있는데 중앙에 섬이 두 개 있고 백일홍과 버드나무 고목이 어우러져 정자의 운치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방초정은 조선 시대 정자와 연못 조경을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어 2019년 12월 보물 제2047호로 승격됐다. 그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절개를 지키며 자결한 어린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어 주위를 숙연하게 한다.

정자를 건립한 이정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25년) 양천 하로의 17살 난 화순최씨와 혼인을 했는데 신행(新行)길에 마을 앞에서 왜병을 만났고 이때 정절을 지키고자 화순최씨가 못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최씨의 절개를 칭송하며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렀고 남편 이정복은 갸륵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훗날 부인이 몸을 던진 연못 옆에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지었다고 하니 방초정의 건립은 절개를 지키다 먼저 간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극한 사랑의 증표인 것이다.
 

화순최씨 정려각과 충노석이지비. 김천문화원

또 화순최씨를 따라 함께 투신한 종 석이(石伊)를 기리는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고 새겨진 비석이 1975년 연못 준설공사 중에 발견되어 주인의 정려각 옆에 세워졌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인 조선 시대에 비록 미천한 신분인 노비였으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 석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었다는 것이 전설처럼 내려왔던 것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방초정에는 ‘芳草亭十景’이라 하여 정자에서 바라다보이는 열 곳의 경치를 시로 읊어 제목을 나무에 새겨 사방 벽면에 붙여놓았다.

가례증해판목. 김천문화원

마을 안쪽 구성초등학교 앞에는 숭례각(崇禮閣)이 있는데 이곳에는 이윤적(李胤績), 이의조 2대에 걸쳐 각고의 노력 끝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자신의 학설을 첨가한 의례서를 완성한 후 이를 1792년(정조 16년)에 직지사 느티나무로 판각한 가례증해(家禮增解)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관혼상제의 증해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목각기법 또한 뛰어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7호로 지정됐다.

상원 원터마을과는 하원천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상좌원리(上佐院里)는 상좌원(上佐院)과 도동(道洞)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역시 연안이씨 집성촌이다.

조선 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하여 상좌원이라 했고 하원(下院), 좌원(佐院)으로도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북, 하북면이 통합된 석현면에 편입되어 상좌원과 도동, 원앞(주막)을 합하여 하원리(下院里)로 명명되었는데 이후 주민들이 줄기차게 상좌원으로의 동명환원을 요구하여 마침내 1983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민청원에 의한 동명환원이 이루어졌다.

1933년의 홍수로 구미리에 있던 석현면사무소 청사가 유실되자 면의회의 결의에 따라 석현, 과곡 두 면을 합하여 지례현의 별호인 구성(龜城)이라 하고 1934년 지금의 자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했다.

이 마을은 이름난 학자와 독립투사를 배출해 원터마을과 함께 조선 시대 김천의 반촌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지금도 연안이씨 문중과 관계된 서원과 재실,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상좌원이라는 지명은 과거 마을 앞 노상에 관용숙소격인 상좌원(上佐院)이라는 원이 있음으로써 얻은 지명이다.

이 마을에는 솝실댁과 내앞댁과 같은 고택이 남아있는데 내앞댁은 1620년에 천여 평의 부지에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문간채 등으로 수십여 칸의 저택으로 건립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만이 남아있다.

현재의 구성면사무소 일대는 과거 상좌원이 있음으로써 원앞이라 했고 또 거창, 김천간 주통행로인 관계로 주막이 번성해 주막 마을로도 불렸는데 1960년대 초까지도 시장이 열렸었다고 한다.
 

도동서원. 김천문화원

상좌원을 지나 하원천 건너에 있는 도동마을은 문도동(聞道洞)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也)”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따왔다고 한다.

1771년(영조41년) 세워진 도동서원(道洞書院)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3호로 이숭원(李崇元), 이숙기(李淑琦), 이호민(李好悶), 이숙함, 이후백(李後白) 등 상좌원 연안이씨 문중 5현을 배향했다 하여 오현원(五賢院)으로도 불리는데 1871년(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18년에 현재 남아있는 명례당(明禮堂)을 세우고 서당으로 운영됐다. 이때 이숭원 선생의 위패만 상좌원으로 옮기고 경덕사를 건립해 모셨다.

상좌원에서 도동마을 중간의 모성산 끝자락에는 1625년 상좌원 출신인 이장원(李長源)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처음 세웠다가 1949년 다시 지었고 1991년 도로 확장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모성정에서부터 공자동 구곡(孔子洞 九曲)이 시작되는데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이 지은 시 “공자동구곡(孔子洞 九曲)” 이 바위 곳곳에 세월의 이끼처럼 새겨져 있다.
 

김부신 기자
김부신 기자 kbs@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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