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299년에 성립된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은 1453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함락시키고 1683년에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의 빈(Wien)을 공략하는 등 수 백년 동안 기독교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한때 동유럽, 발칸반도, 터키, 중동, 북아프리카 등을 석권했던 이 찬란했던 제국은 17세기 후반부터 차츰차츰 영토를 빼앗기며 경제적으로 쇠락했고, 동지중해 지역에 진입하고자 했던 러시아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린당하며 외부 세력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였던 19세기의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로 전락해버렸다. 러시아가 지중해 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했던 해양제국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제국의 존속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영국은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에서 오스만제국을 도와 러시아를 격파하였고, 1878년 베를린 회의(Congress of Berlin)에서는 오스만제국 내에 위성국가를 수립하려던 러시아의 시도를 상당 부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 오스만제국이 키프로스(Cyprus) 섬을 사실상 영국에게 할양하는 등 런던 정부의 대(對)오스만 영향력이 더욱 막강해지자, 오스만제국은 1871년에 통일을 이룬 독일로부터 육군 개편과 훈련 등에 대한 자문을 받기 시작하는 등 베를린 정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만제국의 유능한 장교들이 독일 참모대학으로 유학 가는 등 오스만 군부(軍部)의 친독성향은 갈수록 강해졌고,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전쟁장관이었던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Ismail Enver Pasha)는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총리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일 대사와 비밀 군사동맹조약을 마음대로 체결하였다. 아울러 엔베르는 베를린 정부의 종용에 따라 독일 군함들의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 통과를 허용하고 독일군 장성들을 오스만 육군과 해군의 주요 핵심 보직에 임명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이 독일 편에서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렇듯 기존의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유럽 제패를 이루겠다는 독일 군부의 마스터 플랜에 오스만제국은 제발로 끌려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과 손잡고 전쟁에 뛰어든 오스만제국의 최후는 처참하였다. 1912-1913년의 발칸전쟁에서 이미 큰 피해를 겪었던 오스만제국은 대전을 치룰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비록 영국 해군성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주도한 1915년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긴 하였으나,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어내지 못한 오스만제국은 결국 1918년 10월에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한창 중이었던 1916년에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나누어 갖기로 이미 합의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1920년의 세브르(S?vres) 조약을 맺어 적국(敵國)의 본격적인 해체에 착수하였고, 이에 6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오스만제국은 1922년에 그 명을 다하고 말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세계 최빈국에서 현재의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그간 번영과 발전에 미국과의 동맹과 상호협력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상대가 최강대국인만큼 우리 입장에서 아니꼽고 치사하고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는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지 얄팍한 자존심의 대결이 아니다. 상대에게 양보하고 심지어 굽히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내가 살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외교이다. 당장 미국과의 이견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들을 공유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과 대신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발상이 가당키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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