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 수필가·전 상주문화회관장
김종한 수필가·전 상주문화회관장

능금 꽃피고 지는 한반도 허브 대구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신천 ‘방천시장 김광석 길’ 건너 아늑한 둥지를 마련하여 산지도 8년째다. ‘어울리면 이웃사촌’ ‘정들면 고향’ 타향도 오래 살면 고향이다. 퇴직하고 십이지 육간이 다시 시작한 동전 뒷면의 인생 2막 대구는 제2의 고향이다. 찌는 삼복더위 낮에는 ‘아이스 캐기’ 동지섣달 밤에는 ‘찹쌀떡’ 하며 외치던 소리가 정겹게 들렸던 자유당시대 내 고향 물 맑고 공기 깨끗한 삼백의 고장 상주에서 어린 시절 보냈다. 선친(先親)은 근대화 시절 군청공무원으로 야근이 많았다.

자주 찐빵 사 오기에 밤늦도록 안자고 기다림이다. 매달 도정월보를 가져오면 나는 맨 뒷장에 경상북도 지도를 본다. 대구시 약도에 ‘태평로’가 눈에 들어와 지금도 대구역 앞 태평로는 정감이 가고 글 뜻처럼 편안하고 아득한 느낌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 시절, 도청 소재지는 인구 80만 명의 대구시다. 그때는 보릿고개가 있던 가난한 나라에서, 해마다 남한에서 3번째 큰 대구시만 한 도시가 생겨난다고 인구 억제 정책으로 ‘둘만 잘 낳아 잘 기르자’며 요란했던 가두 앰프방송이 기억난다.

도내 시는 포항, 경주, 김천, 안동으로 대구를 포함하면 5개소다. 구미는 선산군, 경산시는 경산군, 상주· 문경· 영천· 영주시도 군이었다. 어린 시절 ‘대구 하면 능금’이다. 능금인 사과를 많이 먹어 대구는 미인이 많다. 고등학교 진학하면 펜팔 열풍이 분다. 호기심에 대구 여학생과 대화하려고 우표 사러, 편지 부치러 우체통에 철없이 들락거리기도 했었다. 고향 친구가 대구에 유학하여 방학 때 내려와서 시골 도로나 마을에 뭉쳐 다니며 뽐내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시샘도 했다.

내 고향 상주 농촌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자녀 뒷바라지 위해 대구에 살아보니 과거의 도시 동경은 화려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시골에 사나 도시에 사나 공간만 다를 뿐 사는 모습과 형태는 같다. 도시는 도시 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색다른 삶과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큰 병원과 백화점이 있지만, 돈이 많이 들고 차량 매연에 물과 공기가 나쁘다. 시골은 돈이 적게 들고 물과 공기는 깨끗하지만, 의료시설이 빈약하고 밤에는 적막하다.

성모당에 위치한 교구청은 대구경북 관할이다. 대구동구, 군위군, 칠곡군, 영천시, 경산시 5개 시군의 행정경계 명산 팔공산은 갓바위 신앙까지도 대구경북은 한 핏줄이다. 국가 부도에 ‘금 모으기 운동’으로 애국하는 대구여고 옛터에 국채보상공원 빛난다. 민주화 원조인 2·28 기념공원 동·서 쌍둥이형제공원이 국가를 지켰다.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애국 시인 이상화 고택의 정기 앞산 6·25 승전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대구가 대한민국 수호했다.

우리나라의 제2 도시이자 국제 무역항이며 수출전진기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 창원, 포항을 함락위기에서 지켰다. 오늘날 작고 강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며, 수출대국의 위용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있어 조국을 지킨 호국의 대구경북 자랑스럽다. 온난화로 대구경북 전체가 사과주산지다. ‘글로벌 대구’ ‘웅도경북’ 을 위하여! 능금 꽃 피는 대구경북 사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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