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서경대학교 광고홍보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진세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총장·서경대학교 광고홍보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눈 밝은 국민들은 ‘레토릭’(말솜씨 혹은 꾸민 말)에 속지 않는다. 화려한 언변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신 품격과 예(禮)에 반응한다. 예는 인간에 대한 합리적 배려와 존중이다. 예와 품격은 서로 통한다.

이 둘을 갖추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 스스로의 천박함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쉽지 않다.

제자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에게 인(仁)을 물었다. 스승의 대답은 단 네 글자, ‘극기복례(克己復禮)’였다. 주자(朱子)의 해설은 이렇다.

“극은 사욕을 잘라내 버리는 행위다. 그럼 천리(天理)가 회복된다. 먼지를 제거하면 거울이 깨끗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 사욕이 사라지면 예가 회복된다. 예는 단순히 예의만 의미하지 않는다. 안으로 공경이 있고, 밖으로 양보가 있는, 천리와 통하는 상태다. 이 경지에서 인(仁)이나타난다”

그렇다면 공자의 예(禮)는 어떤 수준일까? 그는 자는 새를 쏘지 않았다(弋不射宿). 예(禮)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새를 많이 잡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는 새, 깨어 있는 새, 날개 부러진 새, 아픈 새를 가리지 않고 활을 당겼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오직 깨어 있는 새만 쏜다. 깨어 있는 새라야 화살을 피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새를 잡지 못해도, 사람들은 이 활쏘기 과정에 나타난 품격과 예를 배울 수 있다.

전쟁터에도 품격과 예는 살아 있다. 맹자(孟子)가 전하는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일화를 보자. 유공은 적장이 병이 나서 화살을 잡을 수 없게 되자 활에서 금속 촉을 빼고 네 발을 쏜 뒤 돌아갔다.

금속 촉을 빼고 활을 쏘는 것은 부국강병책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알았던 사람들(知其不可而爲之者)’이었다. 그들을 예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천하통일을 얻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실패하기를, 승리보다는 너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새를 맞히지 못할지언정 자는 새를 쏘지 않는 자의 위엄을 선택한다<『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김영민>.

우리 역시 이런 지도자를 갖고 싶다. 허나 현실은 허전하다. 떼거리 규모로 등장한 대선 주자들은 이분법 논쟁이나 낮은 수준의 말싸움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의 복잡한 사정은 이들의 한가함을 용납지 않는다. 당장 우리 주변국의 급박한 정황만 봐도 그렇다.

우선 중국과 미국은 정면 대결을 결정했다. 그래서 사사건건 노골적으로 대립한다. 미국은 대만과의 관계 강화, 러시아와 중국 분리, 첨단기술 공급망과 국제 무역질서에서 중국 배제는 물론,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려는 ‘레짐 체인지’ 전략까지도 설계 중이다. 중국 역시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언어로 무장했다.

이 사이의 낀 유럽과 일본은 복잡한 셈법을 고민 중이다. 유럽은 ‘제3의 지대’를 숙고한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중국의 인권 침해와 민주의 훼손을 비판하지만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데는 반대한다.

일본은 좀 더 약삭빠르다. 미국이라는 보험은 든든하게 확보하되 중국과도 충돌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적 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인데 바지를 내려야 하는지, 사이다와 독극물의 차이는 뭔지를 놓고 우리 국민이 고민해야 하는가.

대선 후보 여러분. 제발 자중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국민을 대신해 엄중하게 요구한다.

이제는 당신들의 품격을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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