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객잔
대구 출신 김명리 시인이 첫 산문집 ‘단풍객잔’(소명출판)을 출간했다.

역사적 현실과 존재론적 삶 사이의 고뇌를 형상화하며 평단으로부터 극강의 생태적 서정시로 평가받아온 김명리 시인이 창고에 오래 감추었던 글, SNS에 간간히 올린 글, 네팔 기행의 자취들을 엮어 첫 산문집을 냈다.

서정적이면서도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영혼을 매만지는 김명리 시인의 일상적 글쓰기를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김명리
김명리 시인은 머리글에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험난했던 여정을 말해준다.

‘하루에도 쏟아져 나오는 산문집들이 저토록 많은데 나마저 보태어야 할까? 산문집 출간 제의를 받은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굳이 산문집을 내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바가 없었던 때문인지 그동안 신문이며 잡지, 사보 등에 게재한 글이며 단행본들을 일목요연하게 보관해두지를 않았었다. 1991년 난생 처음으로 컴퓨터를 마련하기 전에 썼던 수많은 글과 노트, 잡지들은 숱하게 이사를 다니면서 그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더욱이 2014년 석 달 동안의 네팔 여행 중 박타푸르의 돌밭에서 노트북이 파손되는 바람에 네팔 히말라야를 단신으로 떠돌며 썼던 단상이며 메모들, 노트북 안에 저장돼 있던 글 모두를 잃어버리고 영구히 복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쓰는 일에만 골몰할 뿐 쓴 글들을 차곡차곡 갈무리해 보관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한쪽 귀로 흘려들었던 내 무지와 게으름 탓에 흩어진 글을 모으는 일이 새로이 글을 쓰기보다 내게는 크게 더 어려웠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터이다.’

시인은 책 속 ‘울 엄마 오셨네!’에서 독자들에게 잊고 살아온 인간의 근원적인 생각을 돌려준다.

‘어버이날 저녁 대문간의 불두화 활짝 피어난 때에 엄마가 돌아오셨다. 산골집 적막해서 못 살겠다며 서울 사는 동생네 다니러 가셔서는 거기 눌러앉으신 지 얼마 만인가.

그 사이 지병은 더 깊어져서 지팡이 짚고 부축해 드려도 기우뚱 진동걸음. 여기가 어디냐고 자꾸만 물어 보시는 여든넷, 살아온 기억의 거개가 유실되었지만 꽃과 나무와 새와 구름, 해와 달과 바람의 기억만은 유현해서 불두화 꽃그늘에 기대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그러니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라는 마르케스의 말은 옳다. 여덟 해째 진행성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지만 아직은 당신의 자식들, 손주들 또렷이 알아보시고 사계의 저마다 다른 바람소리, 봄 나비 떼 같은 심금의 기억들만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해 보인다. 맞다, 자기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노인은 없다. 놀라워라, 치매에 드신 우리 엄마, 즐겨 부르시던 노랫말만큼은 한 소절도 잊지 않으셨구나!’

‘담푸스 ’에는 시인이 네팔 등 험산 준령 오지를 찾아다니며 인간과 자연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치열한 작가 정신을 보여준다.

‘해발 1,650m 담푸스에 올랐다. 날씨 흐린 탓에 마차푸차레며 안나푸르나 1봉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초막을 짓고 사는 이들의 풀잎 닮은 웃음, 굵게 팬 주름고랑마다 햇빛이 물살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것을 본다.

도시가 세워지고 교역이 오가고 문명이 꽃피고 큰 바람에 업혀온 작은 바람이 눈앞에 가득한가 했더니 멀리 아득히 어느새 흩어지고 없다.

산이 그곳에 있으니 시절 인연을 옮겨 다니며 사람이, 바위가, 초목이, 하늬바람이 거기에 포자처럼 깃들여 살았으리라.’

김명리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1983년과 84년 ‘탈춤’ 등 5편의 시를 추천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저서로는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1988), ‘물보다 낮은 집’(1991), ‘적멸의 즐거움’(1999),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2002), ‘제비꽃 꽃잎 속’(2016), ‘김치박국 끓이는 봄 저녁』(근간) 등이 있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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