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윤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동윤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지방자치 시대, 대학정책만큼은 중앙집권적이었고 지독히도 요지부동이었다. 교육부와 그 산하기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중심 일괄체재였다. 대입 공정성이 명분이었다: 다른 모든 차별과 불평등은 몰라도, 교육만큼은 ‘절대’ 공정해야 했으므로. 신분과 계층 상승의 공정한 사다리로 대변되는 교육만큼은 그 어떤 다른 기준과 원칙 혹은 명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공감대와 합의는 대단히 공고했다. 그리고 여전하다. 그러나 대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일각에서 무성했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에 대한 성찰이 작동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점수를 매겨야 하고, 시험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입식 교육이 불가피했다. 서열화된 대학의 정문에 점수표를 목에 건 긴 행렬을 세우기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입시가 활용되고 말았다. 교육 본질이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줄자를 들이대듯 형식적 공정성은 그렇게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었다. 일견 공정해 보이기만 하는 사이, 교육의 필요와 책임 그리고 대학의 존재 근거와 이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자유와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었다. 교육마저 자본화의 대상이 되면서 경쟁을 명분으로 평가시스템이 전격 도입됐다. 더 좋은 교육상품 인양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온갖 상품화된 대학 평가지표들이 제시되는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지표가 등장했다. 취업률이다. 기업친화적인 대학으로 거듭나라는 얘기다. 이후 취업 잘 시키는 대학이 좋은 대학으로 둔갑했고, 당연히 모든 대학이 너 나 없이 취업‘률’에 목숨을 걸었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짓는 진로와 취업의 문제를 양적 잣대로만 접근한다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음이다. 취업‘률’은 물론이고, 취업‘만’ 강하다고 해서 좋은 대학이라는 등식에 동의하는 교육자는 사실상 거의 없다.

공정하기만 한 형식적 교육과 취업을 위한 도구적 교육은 교육을 소외시켰다. 세계 최고의 공정성을 담보한 교육제도와 취업에 가장 열을 올리는 대학교육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은 그다지 혹은 전혀 선진적이지 못하다. 공정하기만 한 중등교육은 대학 서열화에 봉사하는 관문으로 전락했고, 충분히 도구적이 된 대학교육은 취업으로 향하는 스펙공정으로 오도되었다.

변화가 필요했고, 도전도 감행됐다. 주입식 암기 위주의 교육 오명을 벗기 위해 학력고사가 폐지됐다. 그 자리에 사고력 중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들어섰다. 여기에 교과목별 특화 활동 이외에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활동 등의 비교과 활동을 가미시켜 창의적인 인재를 겨냥한 학생부 종합전형이 도입되었다. 변화된 제도로도 온갖 갈등과 논쟁이 일었고, 급기야 ‘수능무용론’과 ‘학종폐지론’이 날이 갈수록 힘을 받고 있다. 싫든 좋든, 2023년 우리 교육의 현주소이다.

이제는 고교학점제다. 2025년 전면 시행을 앞뒀다. 점수 1, 2점이 아니라 절대평가로 학점을 부여하고, 교육과정 이외에 학교 교육에서는 충족되기 어려운 다양한 비교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주입식 교육과 단순한 암기와 이해보다는 사고력과 창의력에 방점을 둔 교육적 수요와 필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몸으로 경험하고, 머리로 상상하고, 가슴으로 창의하고, 손으로 디자인하고, 발과 엉덩이로 리:디자인의 기반을 제공하는 교육,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인 까닭이다. 명칭은 판이해 보이지만, 제도적 취지나 내용 면에서 고교학점제는 ‘학종 2.0’ 혹은 ‘학종 시즌 Ⅱ’ 정도로 읽힌다. 내실 있는 운영과 성과에 대한 일선 고교 현장의 우려와 걱정과는 별도로, 방향성이 옳은 것은 분명하다.

일각에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책이란 원래 그렇다. 모든 이가 다 만족하는 정책이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책적 판단과 정책적 결정이 필요한 것이다. 각자의 입장과 논리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기본적으로 목표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정책이 될 수도 없다. 시기상조라고 다그칠 수도 있다. 그럼 시기는 과연 언제란 말인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내 아들과 딸, 내 손주, 그리고 내 제자의 낯빛을 한 번 봐주길 바란다. 한숨이 나온다. 아이들의 고충과 고통의 외침이 뼈에 사무친다.

아! 하나는 분명히 해둔다. 고교학점제, 우리 교육 고질병의 만병통치약은 당연히 못 된다. 형식적으론 공정성이 문제 시 될 수도 있고, 지역 간 격차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극복해 나갈 문제이다. 준비가 덜 된 부분은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준비해 나가야 하고, 단일 고교의 대응으로 역부족인 부분은 대학과 지역사회와 연계해서 메워 나가면 된다. 기왕 전면 실시가 예고된 마당에,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보면서 성공적 안착을 위해 협업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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