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도산 탐방 - 390m 야트막한 산 '천년 신라' 역사 간직

선도산 우측으로 보이는 경주평야. 형산강 뒤 저멀리 남산이 보인다.

형산강은 신라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물길이었을까. 형산강은 어떤 의미로 신라 탄생과 삼국 통일의 모태가 되었을까. 또 천년 왕국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와 형산강과의 상관 관계는 무엇일까. 형산강과 관련된 각종 설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형산강 경주지역을 탐사하면서 이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뇌리를 맴돌았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신라 시절의 형산강일 것이다.

기축년(己丑年) 벽두인 지난 2일(금) 탐사팀과 함께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仙桃山)을 오르면서 또 다시 이같은 생각에 잠겼다. 기자의 공허한 상념을 흔들어 깨운 것은 산 중턱쯤에서 만난 몇몇 할머니들이었다. 일행 중 뒤쳐져 산 중턱에서 쉬고 있는 한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일을 많이한 탓인지 등허리가 낫처럼 굽어 있었다.

태종무열왕릉 뒤편에는 무열왕 가족 묘로 추정되는 고분 4기 뒤로 경주평야가 보인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산 꼭대기 절에" "뭐하러 가세요" "죽기전에 한번 가 보려고" "그럼 처음 가는 겁니까. 어디 사십니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 "82살이야. 요~ 산 밑에 살지만 시집온 후 처음 가는 거야. 죽어 저승가면 부처님이 선도산 밑에 살면서 코 앞에 있는 절에도 한번 가보지 않았느냐고 야단칠까봐 동네 할머니들이랑 함께 한 번 가보는거야…."갑자기 할머니의 말 한마디가 머리속을 후려쳤다.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생들이란 수레바퀴 돌 듯 해탈을 얻을 때까지 삼계(三界-천계·지계·인계)를 돌며 생사(生死)를 거듭하는 존재라는 뜻의 윤회.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할머니 모습은 꼭 저승길 오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얼굴은 영낙없이 시골 아낙 그대로 평안해 보였다.

선도산 정상부분에는 보물 62호인 마애삼존석불과 신라 성모의 영령을 모신 성모사가 있다. 사진은 삼애삼존불.

선도산(390m)은 경주시가지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산이다. 하지만 경주의 역사, 신라의 역사, 특히 형산강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유서 깊은 산이 바로 선도산이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꼭 한번 답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정상에서 형산강과 경주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 시외버스터미널(고속버스터미널) 옆 서천교를 지나자마자 좌회전하면 경주~건천간 구 지방도로가 나온다.(직진하면 충효동 경주대학교 방향 신 도로) 그곳에서 승용차로 5분정도 서쪽으로 달리면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이 보인다. 서악동 주민센터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500여m 정도 들어가면 산불감시초소인 선도산 등산로 입구가 나타난다.

선도산 아래에는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묘가 있다.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는 신라 때의 것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삼층석탑(模塼石塔·모전석탑이라 함)이 저만치 서서 등산객들을 반긴다. 안내문에는 '모전석탑 형식의 유형분포를 조사 연구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므로 중요시된다. 경주 남산리 동탑을 모방한 듯 하며 시대와 조각수법이 다소 떨어진다…'고 적고 있다.

좁은 주차장 입구에서 선도산 정상까지는 보통걸음으로 약 30~40여분 거리. 정상 바로 밑에 서악리 마애삼존석불상(보물 제62호)과 그 옆에 '성모사(聖母祠)'란 간판을 단 신라 성모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한 참 뒤에 중간에서 만난 할머니들이 마애석불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할머니들은 숨을 고른 뒤 차례로 마애석불 앞으로 가 정성스레 예불을 올렸다.

할머니가 말한 절이란 곧 이곳 '성모사'를 뜻하며, 이곳을 찾은 것은 바로 마애석불께 예불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기자도 할머니들과 함께 형산강의 무사 탐사와 건강한 생태계 복원을 기원했다.

형산강 상류 서쪽 위치 '서형산'이라 불리기도

▨ 선도산과 서형산(西兄山)

선도산은 경주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산(西山)' '서술산(西述山)'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 등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서형산'이다.

'형산강'이란 이름을 언제, 누가 붙였는지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단지 신라때 이름이 나오는 형산(兄山) 사이를 흐른다해서 형산강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정할 따름이다. 이때 형산이란 지금 포항과 경주 경계에 있는 '북형산(北兄山)'과 바로 선도산의 '서형산(西兄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 같다.

이때 북형산은 형산강 하구, 서형산은 상류에 각각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부터, 어떤 기준과 연유로 지금의 형산을 '북형산'으로, 선도산을 '서형산'으로 불렀단 말인가. 아직까지 탐사팀은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 줄만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마애석불이 있는 성모사에 오르면 형산강 물줄기가 뚜렷이 보이는가 하면 그 뒷쪽 왼편으로 경주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으로는 형산강을 따라 경주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때문에 서형산인 선도산은 형산강과 경주시가지, 그리고 넓은 평야를 가장 가까이서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을 끼고 있는 북형산 역시 신라의 도읍 입장에서 볼 때 바다와 육지 경계에 위치한 길목으로 지리적으로 중요하다. 이로인해 북형산, 서형산으로 이름지웠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북형산은 서형산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만큼 오히려 '동형산'이 더 적합한 이름이 아닐까.

영경사지·태조무열왕릉·마애삼존불상… 사적 풍부

▨ 선도산의 유적

선도산 기슭에는 영경사지(永敬寺址), 애공사지(哀公寺址) 등 많은 사적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적이 바로 마애삼존불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자연 바위에 그대로 새긴 여래입상으로 얼굴 절반이 마멸되어 보이지 않았다. 입과 코 주변을 삼각형으로 양쪽 귀 중간 아래까지 남고 모두 깨져 버린 것. 왼쪽의 관음보살상도 왼편 허리부분과 머리 일부는 마멸되어 떨어져 나갔으며, 오른편 대세지보살상은 다행히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양쪽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본존불과 달리 남산 마애불과 같은 재질인 화강암을 갖고 와 새겨 함께 세워 놓은 것이었다.

태종무열왕릉 주위 선도산 기슭에는 대형 고분이 많아 이곳을 서악동고분이라 지칭하고 있었다. 태종무열왕릉 옆에는 아들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이 있으며, 태종무열왕 뒷편 일직선상으로 있는 4기의 고분은 무열왕의 가족 묘로 추정하고 있다.

또 이들 고분 북쪽 서악서원 뒷쪽에 고분군이 있는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대편 서쪽에는 법흥왕릉이 있다.

선도산, 즉 서형산은 태종무열왕을 비롯 신라가 가장 융성했던 때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산으로 형산강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신라 천년의 형산강은 그렇게 흘러 또 천년을 이어오고 있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