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구차한 모습을 반복하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기자, 작가인 이안 부루마는 저서 '속죄(The Wages of Guilty)'를 통해 과거사와 관련해 지금까지 일본과 독일이 걸어온 길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안 부루마는 중국문학을 전공한 후 일본 도쿄에서 일본영화를 공부한 전력을 갖고 있는 언론인.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와 영국 시사지 스펙테이터의 기자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독일문화권과 아시아문화권을 비교 분석하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일본의 거울(A Japanese Mirror)' 등의 저서도 발간했다. 1994년 첫 출판된 “속죄”는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저서.

박원화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레만 교수와 같은 일본통 국제정치학자들이 이안 부루마의 저서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면서 국내 일반독자들에게도 필독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레만 교수는 과사를 둘러싼 한ㆍ중ㆍ일 3국간 긴장을 이미 예견하고 일본이 철저한 과거반성을 통해 극동지역에서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학자.

그는 독일이 프랑스와 폴란드에게 한 것 처럼 일본도 중국과 한국에 대하여 철저히 반성, 사과함으로써 오늘날 유럽의 독ㆍ불ㆍ폴란드의 선린관계가 극동에서도 이뤄져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본에게 수차 충고해왔다.

이안 부루마는 일본이 독일과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은 첫 출발이 어긋난데서 비롯된다면서 그 책임은 일본측과 미군 점령 당국에 귀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저서에서 지적한 일본과 독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청년들이 나치시대에 히틀러에 동조했던 부모나 조부모 세대의 침묵을 수치로 여기면서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발발시킨 독일 조국의 역사 때문에 독일인이라는 사실도 부끄럽게 여긴다 이는 역사를 철저하게 적나라한 사실로서 교육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역사왜곡을 부인하는 바, 이는 죄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과오의 고통을 줄여보자는 속셈에 다름 아니다.

독일과 비교해 일본은 피해자들에게 관심이 적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크다.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대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난쟁이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나치 지도자들이 몰락하고 나치시대 법관과 검사 등 관리 약 20만명이 숙청됐지만 일본에서는 해군제독과 육군장성급만 제거됐을 뿐, 나머지 관리들이 그대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1945-1946년 사이 미ㆍ소 냉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전략적 고려하에 이들이 즉시 업무에 복귀하고 우익타도에 앞장섰던 좌익이 1949-1950년 사이에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사죄의 뜻으로 전국 곳곳에 나치 피해자 관련 기념관, 박물관, 관련 유적이 보관되고 지금도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몇군데에 불과하고 대표적인 장소인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한구석에 원폭 사망 한국인 기념비가 있는 정도다. 이 기념비도 1970년 재일 한국인이 세운 것이다.

강제 징용되었다가 사망한 2만명의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이 기념비는 공원안에 제대로 자리 잡은것도 아니며, 현지 한국 교포가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으로 이전코자 하였으나 실현이 되지는 않았다.

히로시마 당국자는 추모소가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추모소에 조차 한국인 명단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독일에서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후에 1950년대 중반까지 독일 법정에서 나치시대 독일인에 대한 독일인 범죄만을 취급토록 한정하였으나 이스라엘에서의 아이히만 재판에 영향을 받고 1979년 돌풍을 일으켰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TV 시리즈가 방영된 후 나치시대의 반인류에 범죄는 영원히 처벌토록 법을 개정하였다.

일본에서의 과거 청산이 미흡한 것은 도쿄전범재판소가 엄격치 못하여 전범의 범죄를 사하여준 결과를 초래하여 일본인들은 전범재판이 승자의 패자에 대한 일방적인 재판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연합국의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인들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식을 갖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원폭 피해가 자신들의 전쟁 발발과 남경학살 및 정신대 등 반인류 범죄결과라는 인과관계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 학교에서는 매년 나치역사에 대하여 60시간의 교육을 받도록 하고 역사를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다루면서 학생들이 국가의 계속성을 위한 정체성을 국기, 노래, 영웅 등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유민주질서에 기초한 개념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일본에서는 사학자인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가 1952년 고등학교 교과서를 저작하여 널리 사용되었으나 4년 후 일본 문부성이 일방적으로 일본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였다는 평가를 함으로써 문제가 제기된 후 정부로부터 재집필을 요청받는다.

이에나가 교수는 1964년 정부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제기한 이후 1967년과 1984년에 각각 추가 제소를 했지만 정부는 1980년대 교과서 내용 중 남경학살 등을 삭제할 것을 고집했다. 1993년 3월 일본법원은 이에나가 교수의 패소를 판결한다.

양국의 또다른 차이는 독일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면서 목숨을 잃었지만 일본내에서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천황을 신성시하는 일본에서 대동아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의 제도가 건재하는 한, 일본의 속죄의식도 희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죄를 고백한다. 이는 신이 보기에 죄악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은 전체사회의 수치와 체면손상의 문제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문화의식의 차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죄의 고백을 간략히 하는 것은 자국 문화에 상치되는 반면 일본에서는 죄의 고백을 장황히 하는 것이 자국 문화에 상치되는 이단적 행동이 된다.

일본이 진정 개과천선할 수 없다면 일본의 군사력은 영원히 평화헌법과 외부세력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 반대로 죄를 뉘우칠 수 있다면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여 진정으로 과거 적대국에게 충분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일본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정치적 책임, 정확히 말하여 전쟁과 평화에 대한 책임의식 없이 계속 과거를 도외시 할 뿐 아니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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