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 없는 인연 끊고 탐욕의 마음 없애는
정신적 단식 감행하라”

불국사 자하문을 오르는 청운교(아래)와 백운교는 모두 33계단으로 돼 있다. 이 다리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한다.

-5월의 연두빛 바람은 꽃가지를 흔들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아카시아 향기로 산이 흠뻑 젖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 곁으로 오시는 분이 부처님이다. 지상의 왕좌보다 빛나고 승천보다 아름답고 세계를 지배하는 일보다 더 놀라운 법열이 해탈이라 가르치신 분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꽃이 되고 향기로 남아 오랜 세월동안 언제나 큰 그리움으로 다가오기에 오월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리움은 부재(不在)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 부처님이 그리운 것은 부처님 같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논두렁을 베고 죽을 수 있어야 출가자라 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유에도 존재에도 무애의 경지가 부처의 마음자리다. 그러나 이 시대에 그런 분이 보이지 않는다.

온갖 집착과 탐욕에 찌든 현대인들의 일상에 고승들의 법문이 한줄기 맑은 바람이 될 것 같아 신라 땅 불국(佛國)으로 갔다. 부처님이 사는 나라가 불국이니 이를 ‘패러디’한 불국사는 신라인들이 왕생극락한 정토이다. 노송과 다보탑, 백운교와 화려한 단청이 하늘로 울긋불긋 수놓은 연등행렬과 어울려 천년을 건너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있었다.

제갈테일편집위원

만나는 스님들의 단아한 모습마다 산수유 시린 향을 느끼게 한다. 말이 없음이 그 또한 말이다. 그분들의 깊은 눈빛에서 욕망은 원래 채워지지 않는 것이요, 행복은 본래 담을 수 없는 것임을 감지한다. 운명은 각자의 카르마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니 가장 좋은 가르침은 침묵임도 알 것 같다. 세상 두두물물이 모두 존재 자체이고 침묵이기 때문이리라.

어느 선지식이 추운 겨울날 마당에서 목불(木佛)을 태웠다. 노승이 기겁을 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자 ‘보면 모르겠소 지금 사리를 찾는 중이요’ ‘야, 이 미친놈아 나무토막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인가?’ ‘그러니까 태우지 않습니까?’ ‘어허’, 노승의 말문이 막혔다.

도(道)를 깨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경지를 보여준다. 선지식이란 도를 깨친 사람이다. 노소의 차이가 아니라 깨달음의 경지가 있고 없음이다. 극락도 지옥도 마음에 달렸으니 깨치면 부처요 모르면 중생이다.

따라서 선지식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해탈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놈아 누가 널 붙잡더냐?’ ‘아뇨’ ‘그렇다면 왜 해탈을 하려는 거냐?’ 순간, 그도 말문이 막힌다. 깨닫는 것은 알고 나면 세수하면서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다. ‘어떤 것이 불도입니까?’ 묻자 도림선사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휙하고 불었다. 수십년 구도로 헤맨 무거운 마음이 한 올 실오라기보다 가볍다는 사실에 문득 도를 본다. 선사들의 1천800가지 공안이 모두 이런 코미디(?)다.

불국사 종상 주지 스님을 만나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어를 부탁드렸더니 한사코 구업(口業)을 짓는 일이라며 사양했다. 시장하면 밥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것이 도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경지를 갈수 있느냐하자. 세가지 실행법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첫째는 정신세계를 다스리는 명상, 선, 사색, 염불 중 어느 것을 택할지 궁리할 일이고 다음은 정신을 다스리다 육신이 빈곤할 수 있으니 선행을 통한 기(氣)를 길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더불어 사는 보살행을 들었다.

밖으로 쓸데없는 인연을 끊고 안으로는 탐욕을 버려 헐떡거리는 마음을 없애라 했다. 이것이 정신적 단식이다. 따라서 욕망이든 증오든 마음에 품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품었던 모진 마음은 모두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런 단식을 통해야 영적 진화를 이룬다.

스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깨는 사람이고, 나를 버려 나를 찾는 삼계를 벗어난 분이다. 남을 위해 나를 닦고 자신이 볼 수 없는 뒷모습을 가꾸는 사람이다. 아무나 스님이 될 수도 없지만 모두가 도를 깨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부처를 팔아 개기름이 흐르는 오만한 화상도 있다.

만공스님이 자주 불렀다는 딱따구리 노래는 유명하다. ‘뒷동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도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들은 뚫어진 구멍도 못뚫는구나’ 대궐에서 나온 상궁나인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를 풀이하는 만공의 해석이 더 걸작이다. ‘진리라는 것은 본래 뚫려 있는 것인데 우리 절 멍텅구리들은 이미 열려있는 진리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히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요 해학이다.

보고 듣는 것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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