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현(구룡포 향토사 편찬위원)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의 시멘트 칠을 벗기자'

구룡포공원 계단을 오르면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인 송덕비를 만나게 된다. 동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터에 우뚝 선 이 비(碑)는 구룡포를 개척한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十河 彌三郞 頌德碑)'다.

그는 구룡포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비문은 현재 시멘트로 덮여 있다. 일본인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포항시가 이 송덕비 비문의 시멘트를 벗겨내기 위해 지역민 의견을 묻고 있다.

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즉 구룡포의 일본식 가옥과 거리 조성은 반일 민족 정서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송덕비의 시멘트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도가와 야사브로'는 누구며, 송덕비는 언제, 왜 세워졌는가.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 도가와 야사브로는 1902년 27세에 지금의 장기면 모포리로 이주해 왔으나 6년 뒤 1908년 구룡포로 거주를 옮긴다.

도가와의 주거 이전은 구룡포가 오늘날 동해안 최대의 수산업 전진기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일본 본국이 정책적으로 보낸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수산업을 하기 위해 이곳 구룡포에 정착했다. 그는 구룡포에 고향 오카야마현(岡山縣) 보다 더 많은 애착을 가졌다. 일생을 구룡포 개척으로 보낸 그는 1944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던 지인들이 1944년 9월 현 구룡포공원에 송덕비를 세웠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양쪽 돌기둥에는 후원자 이름도 새겼다.

그러나 다음해인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후 6·25전쟁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충혼각과 충혼탑이 1960년 7월 구룡포공원에 세워졌다. 그러나 주목되는 해방후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지만 구룡포에서는 비교적 잠잠했다. 이는 구룡포공원에 남아 있는 일제때의 각종 시설물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당시구룡포사람들은 일본인 가옥과 선박을 불태우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이라 생각된다.

당시 경제적 사정이 열악했던 지역민들은 일본제국 재향군인회비 기단을 재활용해 충혼탑을 만들었다. 또 계단 돌기둥도 시멘트를 덮어 활용했다. 이때 도가와 공덕비까지도 재활용하기 위해 시멘트로 덮게 된 것이다. 시멘트로 덧씌운 송덕비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36년 강점 역사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흔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구룡포공원에서 시멘트 칠을 한 흔적을 보면 모두 재활용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와의 송덕비 시멘트 칠만 반일이라는 논리는 억지다. 특히 해방 15년이 지나서 시멘트로 덮는 일이 과연 의식적인 분노와 저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제 강점하 일본인 집사로 일하던 사람들이 해방 후 구룡포의 주도세력이 됐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남긴 집과 재산으로 부를 축적했다. 자연스레 구룡포의 수산업도 그들이 이어갔다. 해방후 구룡포인들이 하나같이 일제강점하의 역사를 치욕으로 느끼며, 반일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과의 친분관계는 해방후에도 오랫동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구룡포회'를 조직한 일본인들은 정기적으로 구룡포를 찾았다.

송덕비는 일제시대의 역사이며, 시멘트를 덮는 재활용은 또 다른 역사로 남았다. 특히 관광객 유치를 위해 시멘트를 벗기는 결정은 피할 수 없는 구룡포의 역사다. 일본 관광객 유치는 이제 다시 그들을 구룡포로 오게 하는, 즉 구룡포의 새로운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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