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권(수필가)

사람이 갖추어야 할 품성 가운데 성실성만큼 중요시되는 덕목은 없다.

어떤 단체나 조직의 분위기가 성실성으로 가득 차있으면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하여 남다른 신뢰와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실성이 없는 조직 풍토에서는 각기 자신의 이득만 챙기기에 혈안이 될 것이니, 거기서는 아예 신뢰나 자부심이나 안정감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성실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성실한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도처에서 불거져 나오는 대소 사건들의 공통적인 원인은 거의가 불성실한 인간성에 기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옛날 대낮에 촛불을 들고 '의인(義人)찾기'에 나섰던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인간성 회복을 일의적인 사명으로 삼고 있는 학자나 문학인마저 그 얄팍한 이해득실 따위에 얽매어 이합집산을 다반사로 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굳이 조지훈의 지조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임을 굳게 믿어온 우리가 아니던가.

성실한 사람은 정직과 신의를 신조로 삼는다. 남을 이용하기 위해 위세를 부리거나 가식하는 일도 없다. 누가 뭐라고 하던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건강증진을 위해 땀 흘려 운동을 하는 것처럼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실한 마음자세를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일찍이 중국의 대학자였던 사마온공은 마지막 죽을 때 제자들에게 정성 성(誠)자 하나만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즉 학문이나 사업이나 그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실하게만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함이었다.

우리 조선조의 대학자였던 퇴계 선생의 경우도 이 성실성에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오로지 자기 학문에 성실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출사명령도 고사했다. 성균관 교리와 대사성, 부제학과 공조참판의 벼슬마저 사양한 그는 고향인 안동에 내려가 후학양성에만 전념했으니, 그것이 곧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사표로 우뚝 서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출세영달을 위해 온갖 추태를 연출하고 있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이 얼마나 감동적인 훈고인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시내를 걷다가 길모퉁이에 있는 구둣방에 들려 구두를 닦은 일이 있다. 온 손에 시커먼 구두약을 묻힌 젊은이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구두를 닦고 있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죠?"라고 물었더니 전혀 뜻밖에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좋은 회사의 사원이었습니다. 구조조정 때문에 실직한 후로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생계안정만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들 녀석이 공부를 잘해 희망을 걸고 있는데, 그 녀석이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 준다면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그는 사실 남의 구두를 닦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희망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어찌 성실한 생활자세의 본보기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땀 흘리는 노력 없이 손쉽게 사는 방법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얕은 꾀, 이기적 지혜만을 쫓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남의 목숨은 물론 자신의 부모까지도 서슴없이 살해하는 패륜적 범죄행위도 다반사가 되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세상에는 지혜가 모자라서 실패하는 사람보다 성실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 우리는 마땅히 지혜보다는 성실 쪽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성실하면 없던 지혜도 새로 생기지만, 성실하지 못하면 있던 지혜마저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곱씹어 본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