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정(대구교대 2년 휴학)

'아이고 효녀네' '일등 신부감이네' '직장은 걱정 없겠네'

대학 2년동안 '교대생' 이라고 나를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대게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다고 했을 때 주위사람들은 "용기 있는 네가 부럽다"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임용고시 상황을 설명해주는가 하면 빡빡한 교대 커리큘럼에서 오는 회의감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현실도피 욕구이며, 앞으로의 교직 경력에 휴학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교생 실습과 봉사활동을 통해 새하얀 아이들의 마음에 마련된 교사로서의 나의 공간을 발견했다. 그 공간을 어떤 색으로, 모양으로, 또는 질감으로 채워 나갈까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가슴 설레임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나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나를 보고, 다음으로 주위를 보았다. 내가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으로 떠났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영국의 CICD는 일종의 대안 학교로서, 일 년에 네 차례 학생들을 모집해 6개월간 교육시킨 후 아프리카나 인도 등 후진국으로 파견한다. 학생들은 각자 파견된 나라에서 6개월간 맡은 프로젝트(주로 봉사활동)를 수행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 2개월간의 마무리 시간을 가진다. 교육기간은 총 14개월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시작 2~4개월 전에 미리 와서 헌옷 수거 등의 일을 하면 등록금 일부를 면제 받을 수 있는 '가이아'라는 과정이 있다.

나는 프로그램 시작 두 달 전인 1월 이곳 영국 뉴케슬에 도착해 가이아 일을 시작했다. 학비 감면 뿐만 아니라 영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 부족한 영어 실력도 보충하자는 판단에서였다.

2개월동안 매일 나의 배낭은 '헌 옷 수거 합니다' 라는 전단지 천이백장으로 채워졌고, 손에는 지도 한 장이 들려졌다. 일곱 시간씩 집집마다 찾아가 대문위 편지함으로 전단지를 넣었다. 머리카락까지 곤두서는 추위 속에서 걷고, 걷고 또 걷는 것부터 도전이었다. 벤치를 찾지 못하는 날엔 남의 집 담벼락에 쪼그려 샌드위치를 먹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함 뒤에서 개에게 손가락을 물릴 뻔하기도 했다. 고약한 영국 날씨 탓에 속옷까지 흠뻑 젖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이 일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단지 몇 장, 헌 옷 몇 봉지의 결과보다 주어진 매 순간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소중히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지금껏 매 순간을 단지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부끄러웠다. 매순간, 바로 지금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 내 자신을 얼마나 자유롭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빛나게 하는 지 실감했다.

어느 새 3월. 후진국으로 가기위해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여는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개발한 학습 프로그램에는 국제 정세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과제들이 오백 여 가지 이상 준비되어 있었다. 'Learning by Doing' 이라는 학교 취지에 맞게 수행과제 또한 녹록치 않았다. 오리엔테이션을 듣는 동안 팀원들의 눈 속에서 흥미와 기대, 두려움과 걱정, 노파심을 모두 읽었다. 어느날 저녁, 우리는 홀에 모여 이미 아프리카에서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온 한 학생이 준비한 영상을 보았다. 순박한 미소를 띈 한 아프리카 어린이의 사진과 함께 '그들은 나의 에너지였다' 라고 마무리 짓는 한마디가 가슴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팀원들의 눈동자를 다시 보았을 때 그들에게서 나는 앞선 모든 생각들이 열정으로 하나 되어 가슴을 뛰게 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나는 변화의 바람을 맞고 서 있다. 그것이 기분 좋은 실바람이든 견디기 힘든 된바람이든 나는 내 안으로부터 즐거운 비명을 들을 것을 확신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