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훈<포항강변교회 목사>

며칠 전, 하늘나라로 가신 95세 된 할머니의 입관예식이 있었다. 예식을 집례하기 전에 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려고 입관하는 현장에 들어갔다. 생전에 그렇게 깔끔하고 정결하셨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단편적으로 편집하여 생각을 해 보며 추모했다.

그러던 내 눈에 문득 영안실 안쪽 옆 벽면에 걸려있는 칠판이 들어왔다. 그 칠판에는 영안실로 들어 온 주검의 순서와 이름과 나이. 사망시간, 그리고 사망 장소를 기록할 수 있도록 칸이 만들어져 있었다.

전부 8명을 기록할 수 있는 칸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이미 6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더욱 더 놀란 것은 사망자의 나이였다. 43세, 19세, 36세.....사망 시간도 새벽 2시, 아침 5시 등....저들은 왜 죽은 것일까? 사고로? 아니면 중한 병으로? 왜 저 나이에? 물론 사람의 죽는 것은 정해진 시간도 장소도 없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고, 찾아 올 때는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은 익히 인정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머물러 있는 그 공간 속에 이미 저토록 시퍼런 나이에 예기치 못한 시간에 주검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생활한다. 그것이 대화다. 대화란 쌍방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비난과 원망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 내면서도 정작 중요하고 아름다운 말들은 내일로 미워버린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더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말이라면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다.

그래야 행복해 질 수 있다. 문득 영안실 속에 들어와 있는 주검들을 보면서 “저들은 죽을 때 할 말 다하고 죽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용서받을 것 다 용서받았고, 용서할 것 다 용서했을까?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죄송하다는 말... 이런 말들을 다하고 죽었을까? 아니면 ‘나중에 하지 뭐’ 하다가 죽었을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속이 상하면 속이 상한대로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정작 사랑이나 미안이나 감사의 말은 늘 아끼고 살아간다.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이나 감사의 말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고 거북스럽다.

중국인 탄줘잉은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49가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인생은 유한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습니다. 경험해 본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눈을 감을 때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두렵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제 진심을 말하지 못할까봐 무섭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이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꿈꿔왔던 일들을 다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칩니다.”

이 책을 추천한 시인 도종환 님은 추천사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감정을 표현할 때 늘 창피하다고 느껴요. 가족에게는 더욱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 맞죠?”

아름답고 소중한 말들은 내일 할 말이 아닙니다. 오늘 해야 할 말들입니다. 반면에 미움과 다툼의 말들은 내일 할 말, 아니 영원히 하지 말아야 할 말들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주변에 오늘 해야 할 말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좋아해” 는 지금 즉시 해 주자. 아름다운 표현은 삶도 죽음도 아름답게 만들어 줄 테니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