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를 방편으로 禪의 문에 들다

달을 품고 있다는 함월산 자락에

뼈(骨)와 구멍(窟)으로 된 골굴사라.

이름이 범상치 않다.

관음굴, 지장굴, 나한굴, 산신굴,

남근바위와 괴석들을 거느리고

해탈에 잠긴 마애불의 천년 미소는

볼수록 경이롭다. 움직이는 선(禪)의 숨결을 느끼고 선무도에 서려있는 화랑의 넋에 취한다.

함월산이 머금은 달을 토하는 날

미륵의 용화세계가 열리리라.

선(禪)은 교리가 없고 교리를 개념화한 경전도 없다. 수행 그 자체다. 따라서 선은 삶이요 각(覺)이다. 허(虛)요 공(空)이다. 방위가 사라지는 무애경지이다. 새소리 물소리요, 보탬도 뺌도 없는 생명의 찬가다. 있는 그대로의 여여(如如)요 자연이다. 청천백일 같은 깨달음의 정신세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절인연이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당대의 중생을 구할 수 있는 방편의 묘를 터득해야 한다.

골굴사가 이런 사찰이다. 깨달음인 선(禪)과 시절인연인 무(武)를 함께 수행하는 선무도(禪武道)의 도장이기 때문이다. 선무도는 선과 무를 병행하여 마음을 닦고 몸을 단련함으로써 단순한 무술의 차원을 넘어서 깨달음을 구하는 방편이 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소림사다.

근본불교에서 비롯된 밀교적 수행법인 선무도는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단련법으로 활용되어 무예와 충절을 고양했다. 이곳 함월산이 화랑도의 주된 수련장이었다고 한다. 체조와 요가, 기공과 정신수양, 무술이 합해진 종합수련법으로 기, 마음, 호흡 등이 깊은 조화를 이루면서 견성(見性) 에 이른다. 무는 선의 부수적인 효과로 본다.

골굴 사 템플스테이(Templestay)프로그램은 불교전통 수행법 외에 선무도가 있어 서 단연 돋보인다. 반가부좌 자세로 지 긋이 눈을 감고 앉아 전신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신선하다. 손은 기의 흐름을 자유롭게 따라가고 있다. 묵언과 적멸 속에 보리심이 보인다.

조금 후 그들은 법당 앞에 나와 하늘과 바람과 천지기운을 더불어 선무도를 수련했다. 간단한 체조와 요가자세에서 몸을 날려 발차기로 진전한다. 수련에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준비수련과 무예동작이 현란한 고난도의 본수련이 있다. 발가락 끝을 오므린 채 발목을 돌리고 무릎을 돌리는 등 간단한 기본동작도 보기처럼 쉽지 않다. 준비수련의 하나인 선요가는 팔 등 다리 머리 배 신체 5부위를 부드럽게 풀어 척추와 관절교정효과가 뛰어난 오체유법이 핵심이다.

선무도의 모든 수련동작에는 호흡법이 중요하다. 특히 삼토법(三吐法)은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켜서 심신안정효과가 크다. 반가부좌 자세에서 입을 가볍게 다문 뒤 숨을 천천히 들어 마시고 길게 내쉰다. 하루에 세차례씩 세 번 반복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두 가지 핵심수행법이 지(止)와 관(觀)인데 선무도는 관법(觀法)에 속한다. 주관과 객관, 정(靜)과 동(動)이 조화되고 나와 우주가 일체가 되는 이 수련법은 심신을 이완시키면서 각종 질병을 예방하며 궁극적으로 도에 이른다.

많은 수련자들은 만성피로, 스트레스 해소와 함께 집중력이 높아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관음굴을 오르면서 마주친 외국인 수련자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노르웨이라고 대답한다. 미소 띤 얼굴로 동양적 신비감에 감화되어 수련소감을 굿(Good)이라고 했다. 외국인들에게 템플스테이는 최고의 한국관광 상품으로 꼽힌다고 한다. 미국 LA, 캐나다의 토론토, 독일, 호주 등에 선무도의 도장이 있다.

20여년 동안 국내외에서 선무도를 포교해온 설적운 주지스님은 선무도는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라 했다. 원효 스님의 44대 손이며 태권도의 고단자다. 중생을 구제하려면 천수천안(千手千眼)관음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이곳은 선무도의 대중화를 위해 교육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초등학생, 청소년, 기업체, 장기입산수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산사의 독경소리, 새 소리, 바람소리, 연꽃 향기 속에서 나(眞我)를 찾는 삼매에 든다.

선(禪)의 최고봉인 조주스님은 평상심을 도라 했다. 천리 길을 찾아와 도를 묻는 학승에게 아침 먹었느냐 묻고 가서 그릇이나 씻어라 했다. 도란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는 것은 망각(妄覺)이요 모르는 것은 혼란이기 때문이다. 대도는 확연한 공(空)일 뿐이다. 가장 큰 것은 밖이 없고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다. 우주를 한손에 움켜쥐어보니 좁쌀 한 톨만 하다는 고승의 오도송도 같은 맥락이다.

선(禪)의 자리에는 임제라는 큰 별도 있다. 곡괭이로 땅을 파면서 사방에서 중들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다 산채로 묻어라고 포효했다. 생매장도 불사한 임제의 강한 자기부정에서 진정한 선을 본다.

무(武)도 선(禪)의 방편임을 바로 알 때 선무도도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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