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여름의 끝자락을 물고 오가던 가을비도 이제는 제 자리로 돌아간 듯하다. 가을 하늘 높다고 했던가? 가을 햇살 쏟아지는 풍경은 가히 아름답다.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며 변함없이 바다로만 향하고 있는 형산 강물조차도 하늘색을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강변에 자라고 있던 잡초들도 푸르른 청춘의 시절은 과거로 보내놓고 이제는 갈색빛 세상으로 진입중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팔 소매 옷이 전부인 냥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긴팔 소매로 바꿔 입었다. 지금은 여름과 가을이 임무 교대 중이다.

문득 시외로 벗어나 본 지난 주말. 길가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생명의 끈질김을 보았다. 길 가에 박혀있는 무명의 돌에게서 묵묵히 자리지킴의 소중함을 보았다.

바위 틈 사이로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푸른 이끼를 보면서 못내 살아있음의 신비로움을 보았다. 흉내 낼 수 없는 풀벌레 소리들은 자연 속 공명의 이치를 듣게 해 주었고, 흐르는 맑은 작은 시냇물 가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보았다.

생활공간 속에서 한 걸음만 나와도 이토록 세상은 신비함과 오묘함으로 충만해 있건만, 밀폐된 공간 속에서 세상모르고 지내 온 나날들이 문득 아쉬움으로 몰려든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가을이 내게로 이토록 가까이 와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세상은 넓다고…사실 그렇다. 세상은 넓다. 세상은 넓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좁다. 삶의 공간보다 더 좁은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고 생각이다. 폐쇄되고 편협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고 생각이다. 살기가 각박해서라고 자위해 본다.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서바이벌 게임하듯 숨죽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그래도 그렇다. 세상은 넓은데 우리는 인생을 너무 좁게 살고 있다. 도토리 키 재기식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넓은데 그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마음도 생각도 따르지를 못한다. 우리 자신들 속에 갇혀있다.

인생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가보아야 한다. 세상을 보면서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여는데는 자연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으나 여러 말보다는 침묵으로 찾아드는 자연만큼 세상을 알게 하는데 있어서 좋은 스승은 없다.

가을은 인생을 성숙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계절이다. 가을의 자연은 인생의 깊이를 더해 준다. 오고가는 길가의 살아있는 모든 미물들이 삶의 의미를 보여주며 노래하고 있다. 잠시 가을로 나들이 해 봄이 어떨까? 세상사世上事, 인생사人生事, 일상사日常事 잠시 접어놓고 세상으로, 자연으로, 가을로 나들이 한 번 하고 돌아옴이 어떨까?

문득 중국에 머물고 있는 내 친구 시인 정창원의 시집 “ 아! 내 안에 시가 없다”에서 노래하고 있는 “가을 소묘素描”란 작품이 떠오른다. 내 친구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 유난히도/ 자글자글 끓던 여름이/ 처서가 지나면서/ 휘청 허리가 꺽이더니/ 조급한 코스모스/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다./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던 들판이/ 용케도 실한 미소를 띄며/ 구릿빛 농군의 얼굴을 읽는다./ 제법 따가운 햇살 속/ 아직 여물지 않는 가을을 익혀 가느라/ 분주히 들녘을 빗질해 가는 잠자리떼/ 한결 말쑥해져 가는 들녘에 서서/ 그분의 기막힌 창조 솜씨에/ 내 심장은 익어가는 풋가을이 된다./ 전문”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아직은 풋내음이지만 가을은 익어가고 있다. 지난여름 날의 아픔도 쓰라림도, 고단함도 익어가는 가을에게 주자. 그리고 좀 더 성숙한 삶의 처세술을 가을 속에서 배우자.

세상을 움직이며, 계절을 바꾸면서 사람들에게 부단히 삶의 교훈을 던져주며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창조주의 기막힌 조화로움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심장이 익어가도록 해 보자.

가뭄도 홍수도 피할 수 없는 인생살이였다면 폐허가 된 그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있지 말자. 이제는 추수할 농군이 되어 지나간 가뭄과 홍수의 뒷정리를 하자. 팔을 걷어 올리고 가을 속으로 들어 가보자. 그리고 닫힌 마음과 생각의 문들을 활짝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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