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 백수 정완영

백수 정완영선생이 백수문학관 입구 자신의 흉상앞에서 시를 설명하고 있다.

잘 구워낸 청자 같기도 하고 진흙 속 연꽃 같기도 하고. 알고 있는 말들을 다 내려앉혀도 오히려 남은 그릇에 채울 말을 찾지 못한다는 시조.

한국 시조 문학사에서 김천이 배출한 백수 정완영(91)을 빼놓을 수 없다.

김천 직지사 건너편에 백수문학관이 건립되면서 평생을 두고 창작한 모든 작품을 백수문학관에 기증한 정완영선생은 전통적 서정시조의 원형을 가장 잘 지켜오는 시조시인이란 평을 듣는다.

김천시 대항면에 위치한 백수문학관.

"시는 말로 쓰는게 아닙니다. 행간에 말을 숨겨두는 것이지요."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가장 현대적인 시조 쓰는 법을 훤히 꿰뚫을 만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그가 구사하는 수사는 천품이다.

붓끝 하나로 70여 년을 안 굶어 죽고 살았다 할 만큼 작품과 세계관 또한 뛰어나다. 그동안 쓴 작품만 2천여수. 펴낸 책만 25권, 그 중 시조집만 14권, 창작 지도서 2권, 수필·수상 시조산책을 합치면 25권이다. 1941년 작 '배밭머리'는 중학교 교과서 최장수 수록작품이다.

60년대 초 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지를 통해 데뷔 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이 당선됨으로써 정완영선생은 날개를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43세.

꽤 늦은 문단 진출이었음에도 그는 세월의 큰 줄기를 제대로 탔다.

펜 하나 호주머니에 넣고 11명이란 적지 않은 식구와 서울 행을 결행했다. 글 써서 먹여 살린다는 결심을 하고 고향을 떠난 그의 호주머니에 든 것은 돈 5만원이 전부였다. 극약도 챙겼다.

하지만 정완영선생의 서울 생활은 한 마디로 따뜻했다고 한다. 등단 후 질이나 양에 있어서 엄청나게 활동을 했다. 늦게 출발했다는 것은 대붕(大鵬)이 비약을 기약해 준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것은 완성으로 성숙해가는 은밀한 길을 터주었고, 때문에 시조를 신앙 이상으로 공들였다.

시를 말할 때, 우리는 가람과 노산(鷺山)을 말하고 그 뒤를 이어 초정(草汀)과 호우(鎬雨)를 들고 그 다음에 백수 정완영을 세운다. 이것은 현대시조의 초창기, 계승기, 완성기라는 뜻과 별로 다르지 않다.

조선철도주식회에서 경리 책임자로 당시 1천500만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정신의 본향이며 인생의 본류인 문학을 위해 35세때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짧은 시조사에서 시조 한 길에만 전력 투구하면서 빼어난 봉우리로 우뚝섰지만, 김천이 배출한 문재를 오히려 고향에서는 잘 모른다.

서울가면 고향이 그립고 고향에 돌아오면 고향은 더 멀리 있다고, "고향에 돌아오면 키가 더 낮아짐을 느낀다"는 것은 노시인의 서운한 마음을 우회 표현한 것은 아닐런지.

정완영선생은 지금도 한 달이면 1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하루 10시간 작품을 쓰고 하루 3~4시간 잠잔다는 그는 한국문단에 우뚝 솟은, 틀림없는 봉우리다. 지난해 고향인 김천시 대항면에 백수문학관이 건립됐다. 때문에 한 달이면 10일은 서울, 20일은 고향인 김천에 내려온다.

그동안 우뚝우뚝한 명시인이 산맥을 짓고 더러는 가기도 하고 더러는 있기도 하나, 아직 시조는 미완의 궁궐이다.

"시란 말씀의 전각입니다. 때문에 시는 인생의 길에 있어 지고지순한 오솔길이어야 하지….", "추억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고 고독은 많이 가질수록 부자"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성취감이다.

그는 배낭 하나 메고 142개 시군을 다니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목숨의 이치도 깨달았다고 한다. 고적지와 사찰마다 자신의 발길이 안닿은 곳이 없고 시상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그는 각 사찰을 지나칠 때마다 시조를 지었는데 그 중 빼어난 시조가 운문사라고 한다.

이십대 초반에는 객기 하나로 배낭을 걸머지고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절 앞에 세워진 부처 앞에 손 모으고 무릎 끓어 경배 드리고 나니 이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돌 중에서 속살 깎아 탑을 지어 세워놓은 한과 정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는데 이것이 예술의 종교적 접근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시인은 모름지기 기행시를 잘 써야 옳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쓴 시를 훤히 외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90을 넘긴 그는 자신이 쓴 시를 외우면서 그 속에 숨겨둔 뜻까지 들려준다. 이를 두고 어찌 나이든 사람을 걸어 다니는 박물관, 걸어 다니는 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 가끔의 길이 있겠지만 대별하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는 세월을 곶감 뽑아먹듯 빼먹고 마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하루하루를 탑을 쌓듯 쌓아올리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세월을 소진하고자 하는 사람과 생애를 역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시를 쓰는 순간만이 즐거웠고 시를 쓰는 순간만이 살고 싶었다는 백수 정완영.

그는 어느 사찰이나 고적을 찾아 갔을 때 거기를 지켜선 탑이거나 碑가 조금은 기울어져 있거나 금이 가 있어야 비로소 그 탑이나 비에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고 한다. "그 사람의 가슴은 그 사람의 국토요 그 가슴 속에 잘 다스려진 상처나 영광은 그 국토의 고적이요 문화재다. 우리는 고적도 문화재도 없는 사람을 무슨 흥미로 기웃거리기나 하겠는가."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조부로부터 어깨 너머로 한학을 배우면서 문장 행간마다에 실린 뜻을 터득할 만큼 다감했다.

1946년 김천에서 '시문학 구락부'을 발족했고 1947년 펴낸 동인지 '梧桐'은 당시 가격이 500원이었으나 근래 소더비 경매에서 100만원에 팔리는 영광스러움도 있었다.

고귀한 기품을 담은 청명한 물이 유유히 흘러내린다는 뜻을 지닌 백수(白水), 노년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청명한 소리가 독자들에게는 오래오래 기억되리라. (054)436-6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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