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임 중 <포항중앙교회 목사>

프랑스의 문호 ‘빅톨 위고’는 인생을 전쟁에 비유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라는 것에서 갈파했습니다.

영국의 문호 ‘윌리암 세익스피어’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습니다.

인간은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는 의미에서 갈파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농사에 비유했고, 어떤 이는 인생을 일장춘몽에 비유했고, 어떤 이는 인생을 예술에, 어떤 이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삶의 질문 하나를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입니다.

한 농가의 부인이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수술후 병원비가 많이 나왔고 아들은 병원비를 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소를 팔아서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것을 보시고는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에 다시 입원해야 했고, 산소 호흡기를 해야 하는 등 더 중하게 오래 동안 치료를 받으며 병원에 있어야 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입원을 한 후 퇴원하는 날,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간호 과장이 아들에게 “이번에는 무엇을 팔았습니까?”라고 묻자 아들은 집을 팔아서 다시 그 집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사치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예기(禮記)에 나오는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구슬은 갈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옳은 길을 갈 수 없다는 말처럼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우리는 학도(學道), 수도(修道), 구도(求道), 행도(行道)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며 바울은 이를 깨달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하는 물음은 분명히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동시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인 이상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고 또 기쁨도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놓고 하루에 5분씩이라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루하루를 뜻깊게 살아갈 것이고 우리 사회는 더욱 인간적인 사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는 일”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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