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정평동 박흥태 선생

대구시니어체험관서 만난 박흥태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죽음! 공자님도 그것만은 모른다 했으니 누군들 두렵지 않겠는가! 내세(來世)는 아직도 그 실체를 짐작도 할 수 없으니 불의에 그를 맞는 사람은 비통할 것이다. 손발을 주물러 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어떤 이야기도 들어주고, 어떤 화풀이도 받아주면서 같이 울고 웃으면서 끝내는 마음을 얻어 죽음은 무서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환자가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게 함으로서 안정을 찾고 기대를 품게 해 편안하게 이 세상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호스피스의 할 일이다.

박흥태(73)선생은 교직에서 34년 봉직하면서 남다른 공로와 헌신적인 봉사로 국민훈장 석류장까지 받았으나 퇴직 후 줄곧 호스피스 봉사의 길로 나섰다. 봉사할 대상이 많은 데 왜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힘든 일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니 "제가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정신적으로는 퇴직을 못했습니다. 교직의 연장선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들에게 꼭 한번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죽음에 다다른 분들의 불안과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생에서 마지막 고통을 위로하고 영혼을 인도하는 일은 노인의 역할이 권위가 있지요."

선생은 퇴직 후 7년째 말기 암 병동에서 봉사해오면서 5년 전 가슴 아팠던 사연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비오는 어느 날 30대 중반의 한 여인이 한 아들은 등에 업고 두 아이를 앞세운 채 말기 암 병동으로 들어섰다. 박 선생은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저 3남매를 어쩌란 말인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주머니를 맞았다. 그녀의 투병의지는 눈물겨웠다. 그는 죽음도 부정했다. 속수무책인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 그것은 젖먹이 3남매의 어머니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의 삶은 너무나 짧았다. 유별히도 자신을 의지하던 아기 엄마를 떠나보낸 뒤 박 선생은 지금도 애절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남은 3남매의 장래를 걱정하셨다.

필자는 박 선생의 생사관(生死觀)이 궁금했다. 직업적 의무도 아니고 자원봉사로 임종에 수발드는 일을 자원했으니 특별한 동기나 신념이 있을 것 같았다.

말기 암 병동서 일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으니 "죽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 왔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한다고, 피한다고 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도 본인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듯이 죽음 또한 절대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24년 전 위암에 걸려 위를 5분의 4를 잘라내고도 지금도 살아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섭리'라고 확신합니다. 특히 우리 노년에 하고 싶은 말은 부질없이 죽음을 면해보려 안간힘 쓰지 말고, 잘 죽기 위해 진작부터 공부하고 봉사하는 것이 도리어 장수의 비결이 된다고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박 선생의 생사관은 간명하고 단호했다.

불가에서는 인간의 삶을 '누에의 윤회전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누에는 번데기로 변하는 것을 모르고, 번데기는 자신이 나방으로 변신하는 것을 모른 채 알을 낳고 다시 윤회한다. 가톨릭 테레사 수녀도 죽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맞았다. 임종 때 "마마 좀 주무시지 않겠습니까?" 하는 권유에 "아니다. 잘 수는 있어도 자서는 안 되지. 죽음이 다가 왔는데 부지중에 그를 만나서야 되겠는가. 깨어서 맞아야지!" 수녀님의 말씀도 죽음 뒤에는 '새로운 삶'이 있음을 '암시'하는 뜻이 아니었을까! 개벽이래, 이 세상에는 한 방울의 물도 불어 나거나 줄지 않았고 그대로 돌고 돌았을 뿐이니.

깨달은 사람들의 '윤회적 생산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것이다. 일년초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건강한 씨앗을 남기는데…. 박 선생은 퇴직 후에도 이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호스피스 간병사 교육, 웰-다잉(죽음 준비 교육) 지도자 과정을 다 마치고, 34년 교직의 경륜과 사랑을, 7년 전부터 마지막 봉사에 쏟아 붓고 있다.

필자는 대담을 마치면서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박 선생님의 영원한 축복을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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