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예술가 이을락 선생

이을락 선생이 손수 지은 황토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기계에 사는 농사꾼인 이을락 선생, 그러나 서예, 사군자, 서각들의 현란한 솜씨가 펼쳐진 그의 작품을 대하면 단순히 농사꾼으로만 부를 수는 없겠다. 이런 예술적인 재능 뿐 아니라 그가 부인과 둘이 사는 황토집도 손수 지었다. 예쁜 기와집 마당에 들어서자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정정해 보이는 이을락 선생이 서각할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두 그루 매화나무가 막 꽃망울을 터뜨렸고, 은은한 매화향이 황토집의 격조를 더욱 높여 준다.

우리는 별 생각없이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던가,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선생의 젊은 날 고생한 이야기며, 낮에는 그 많은 농사일과 과수원에서 일을 하고도 밤 늦게까지 서예며 서각 한학을 공부하는, 선생을 위해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선생은 양반 가문의 9대 독자로 태어나 귀함을 받을 만 했지만, 아버지가 아무리 잘해도 칭찬할 줄 모르고 자신만 아는 분이라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더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 안하는 양반들이라 문중 재산, 집안 재산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리어카 한 대 뿐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며 사신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결국 선생은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산골로 찾아가 머슴살이도 하고 남의 땅 소작도 하면서 근근이 모아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밤낮을 모르는 배움으로 잠재능력을 개발해 서예를 하고, 피리, 아코디온, 기타 등도 연주하며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진감래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집이 정말 예쁜데, 집을 지어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예,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흙벽돌을 만들어 봤고, 안강 고향땅이 풍산금속에 수용되어서 감포, 상옥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안 사람이 과수원을 빌려주어서 해봤는데 실패했지요. 4년을 실패하고 거기를 떠나려니 집이 없었지요. 그래서 집을 내 손으로 지어보자 해서 그때 집을 지어봤습니다.

-형편이 어려우셨는데 집 지을 땅은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선생이 옆에 앉은 부인을 쳐다본다. 부인의 얼굴에 젊은 날 고생한 티는 없고 웃는 모습이 곱다. 남편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 지금은 안락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옛 여인의 곱고 단아한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사람 덕분이지요. 결혼할 때 금반지 세 돈을 해 주었는데 그것을 선뜻 팔아 돼지 한 마리를 사서 그것을 밑천으로 불려서 땅 이백평을 사둔게 있었지요. 거기에 집을 짓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벽돌은 흙으로 찍으면 되는데 그때는 산림법이 엄해서 나무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산에 나무를 몰래 베어 리어카에 실어 와서 모아두곤 했는데 얼마 후에 진외가(아버지의 외가) 할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누가 자꾸 산에 나무를 베어간다고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 산이 그 할아버지 산인 줄 몰랐는데 그렇다고 제가 베었습니다 하고 나설 수도 없고 모른 척했지요. 그때 온전한 집을 지어봤습니다."

방에는 묵향과, 황토의 자동 온도 습도 조절, 해독작용 등의 덕분인지, 맑고 신선한 기운이 느껴지고 군데군데에 선생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서예를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문중에 일이 있으면 내가 주동이 되어 해야 하는데, 글씨 쓰는 일도 내가 좀 잘 써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남보다 잘 쓴다고 하니 또 사군자도 배우고 싶고, 사군자가 어느 정도 되니 서각도 해보고 싶고, 자꾸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생겼지요.

그때는 농사지으면서 조그만 가게도 하고 있었는데 낮에 일해놓고 경주 불국사 부설 불교대학으로 가는데 기계에서 기차시간에 맞추려고 막 뛰어다녔습니다. 쉰 살에 시작했으니 벌써 한 25년 되었네요.

-요즘 제일 몰두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요즘 경주유림회관 한시반에서 한학을 공부합니다. 얼마 전에는 절에서 현판을 부탁해서 몇 점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것들도 제작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하면 그것도 내가 배운 보람이고 봉사지요. "

선생은 지난 2006년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쓰고, 그리고, 깎아낸, 작품들을 모아 고희 기념전시회를 열고 "발자취"라는 작품집을 내었다.

지금도 4천500평 과수원을 혼자 가꾸고, 한학을 배우고, 작품을 제작하는 일을 젊은 날과 똑같이 의욕적으로 하고 있는 선생은 공부는 할수록 재미가 있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나이 먹을수록 더 느낀다고 말한다.

필자를 배웅하며 집 앞 매화나무 앞에 서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그들의 예쁜 황토집과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분처럼 편안해 보여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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