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4대 길지' 로 명성

봉화군 유곡리 충재종택 전경.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숱한 사화 속에서도 꿋꿋한 절개를 지켰던 충재 권벌.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은 영남의 4대 길지(吉地)로 손꼽히던 명당으로, 충재 자신이 선택한 땅이다.

영남의 4대 길지는 풍산 류씨가 사는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가 사는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이씨가 함께 사는 경주 양동마을, 안동 권씨가 사는 봉화 닭실마을 .

이들 네 곳 중 닭실마을만이 1963년부터 사적 및 명승 제3호(내성유곡 권충재 관계유적)로 지정돼 있다. 이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곳은 도립공원 청량산의 수려한 풍광과 태백산맥에서 발원한다는 낙동강이 기암절벽을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거북바위 위에 섬과 같이 자리 잡은 청암정의 모습.

닭실 입향조인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안동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됐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됐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돼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돼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됐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문집 9권 5책을 남겼다.

충재 선생의 종택을 닭실마을 앞 부여현 언덕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장엄하다.

솟을대문과 입구자형 종택, 그리고 외삼문과 내삼문까지 갖춘 불천위 사당과 가묘(家廟), 별당형 정자인 충재와 거북바위 위에 섬과 같이 자리 잡은 청암정(靑巖亭), 그리고 44평 규모의 유물전시관, 잘 손질된 마당의 잔디와 담장은 전통 건축미의 정수다.

이 종택은 다시 소위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감싸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길지요 명당이라고 할 만하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문자도 떠올리게 한다. 권벌이 기묘사화를 겪고 이곳에 이거하면서 안동권씨 세거지가 됐다.

'충재(일명 寒棲堂)'종택을 방문해보면 정자의 현판에 주목해볼 일이다. 그야말로 선비를 닮은 아담하면서도 그 당당함에 마음이 끌린다.

충재의 절조는 바로 이 작은 정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리라.

충재종택에는 문중에서 마련한 재정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94년 충재선생유물관을 건립했다. 현재 이 종택의 유물전시관에는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연산일기 등 종가의 귀중한 문화재 3천여책이 보관돼 있다. 2005년 문화재청과 영남문화연구원이 공동으로 충재종택 소장 문헌자료를 조사한 결과 고서 15종 184책, 고문서 15종 274점, 유묵(遺墨) 8종 14점이 보물로 지정됐다.

이들 고서와 고문서의 특징은 다른 종가에 비해 작성시기가 이르다는 점이다. 일기의 경우에는 임란이전 지방관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봉화읍 삼계리에 있는 삼계서원은 권벌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유림에서 1588년 (선조 21년)에 서원이 건립돼 1660년(현종 원년)에 삼계서원으로 사액(賜額)됐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년)훼철됐다가 1960년 복원돼 봉화를 대표하는 중심서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곳은 학문 연구의 중심지로 여러 문집들이 간행됐고 수준 높은 책자들이 편찬, 기획되기도 했다.

권벌이 강학을 하던 '청암정'은 영화 '음란서생' 등 여러 영화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니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청암정에 올라보면 '근사재(近思齋)'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충재의 서책이요 가문의 자랑인 근사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공간이다.

조선시대 학자의 필독서였던 근사록은 원래 중국에서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등 네 학자의 글에서 일상 생활에 절실한 것을 뽑아 편집한 책자다. 제목은 논어(論語)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 말로 '절실하게 묻고 그것을 가까운 데서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전체 14권 622조목으로 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래 수차에 걸쳐 간행됐고 몇 종은 현재 보물로까지 지정됐다. 보물로 지정된 책들 중의 두 종류는 충재 종택에 보관돼 있다.

권벌을 불천위로 모시는 충재 선생의 17대 종손은 권정우(權廷羽, 1922년생) 씨다. 차종손은 권종목(1943년생) 씨, 5남 1녀중 장남이다. 그는 중학교 졸업 이후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와야겠다는 일념에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이후 봉화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29세에 경주 양동의 월성 손씨에게 장가들었다.

차종손은 영남 4대 길지(四大吉地) 중에 안동 내앞(川前)만 빼고는 모두 깊은 관련이 있으니 참으로 누리기 어려운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가의 정신이 강한 그는 유교문화 사업으로 닭실마을이 반듯하게 조성되고 충재선생 유물관을 지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의 말 속에서 선비정신을 닮은 강직함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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