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19. 구미시 인동동 인동장씨 모원당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불천위 사당.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모원당에는 이같은 구절의 시가 있다.

상촌 신흠의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의 일부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는 의미로 선비의 기품을 드러내는 시다.

인동장씨(仁同張氏) 모원당은 구미시 인동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동장씨 남산파의 종택을 일컫는다.

남산고택 모원당과 수령 387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

인동장씨는 고려시대 초기 산붕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을 시조로 한다. 그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해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삼았다가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이 관향이 됐다.

장금용의 유허지는 구미시 인동동 중리에 있으며 고려때부터 이곳에 촌락이 형성됐다.

그러나 장금용이후 몇 대에 걸친 행적은 뚜렷하지 않지만 관직은 꾸준히 이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다 조선초기 장안세(張安世)가 배출되면서 문호가 신장되기 시작했다.

장안세는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인물로 김집(金集)편찬한 '두문동 72현록'에 16위로 입록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영남학파 내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하다가 16세기 중반 인동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학풍을 진작시켰다.

학문은 장순을 거쳐 장현광으로 계승된다. 장현광은 장우의 6세손으로 당대를 풍미했고 인조반정 후 대표 산림 가운데 한 명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과거에는 뜻을 두지않았고 오로지 학문에 힘써 이황의 문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모원당은 장현광을 불천위로 모신 남산파의 종택으로 옥산 서쪽 마을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파조인 장우가 터를 잡았고 남산파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한 칸의 홑처마 정자 지붕으로 안쪽에 현대식으로 개조된 한옥에 현재는 종손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뒤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사당은 원래 장현광의 선친인 장열(張熱)의 가묘로 건립됐으나 그 후 장현광의 위패를 봉안한 불천위 사당이 돼 해마다 음력 9월 7일 후손들이 제향하고 있다.

종가의 인물로는 불천위 장현광(1554~1637), 장응일(1599~1676), 장경우(1581~1656), 장복추(1815~`900)등이 있다.

모원당은 장현광 선생(1554∼1637)의 가옥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거처할 곳이 없자, 문인 장경우를 비롯한 문도와 친척들이 협력해 1606년에 건립했다. 그리고 청천당은 여헌선생의 자제인 청천당 장응일(1599∼1676)이 건립한 당우로 학문을 닦고 교유의 장으로 삼았던 곳인데, 1607년에 세워졌다. 여헌묘우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1650년에 창건됐다.

모원당을 세운 장현광 선생의 역사적 위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인동, 자는 덕회, 호는 여헌이다. 23세가 되던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알려져 조정에 천거됐고 주어진 관직에 대해 진퇴를 거듭하다 1602년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많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24년 사헌부 장령, 사헌부 집의, 공조참판, 1626년 형조참판을 거쳤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돌리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암산에 들어가 반년후에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장현광선생은 관료로 보다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바쳤으며, 재야의 산림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강 정구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지만, 이기론이나 심성론에서는 퇴계의 학설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현재 모원당을 지키고 있는 종부 김봉연(35년생)여사는 안동 풍산 오미동에서 시집왔다.

'봉황당이 연 못가에서 놀라'는 뜻으로 조부가 봉연이라 이름 지어주었다고 한다. 종손 장철수(34년생)는 '양반 선비'로 살다가 2009년 1월 작고했다. 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붓글씨를 잘 썼으며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들 장환호(78년생)는 16대 종손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손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함을 느끼고 있다.

종손의 고종사촌 여동생 장인수(61세)는 작고한 종손의 존재감에 대해 '정신적 지주가 붕괴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종손에게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물어보면 항상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가 오랜 병고를 견딘 것도 종손으로서의 책임감일 것이라고 했다.

2008년 결혼한 장환호는 1978년생이다. 그는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종가를 오가고 있다. 2009년에 아버지의 작고로 종손으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크다고 했다. 주위에서는 그를 "외모가 선하고 예절이 어려서부터 몸에 밴 점잖은 젊은이"라고 했다. 종부 김봉연도 '아들이 훌륭하게 장성해서 든든하고 좋다'고 한다.

"종부의 삶이라는게 자기를 버려야 하는게 정말 많잖아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안타까운 부분도 있고, 가문으로 봐서는 참 고마운 점도 있고, 그런게 인제 감정이 좀 교차되는 부분이 좀 있어요. 참 감사하죠 어쨌거나 간에…" 장환호는 접빈객·봉제사의 일상을 접하며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종가 문화에 길들여진 종손이다. 어린 시절부터 종가의 예의범절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니 만들어진 종손으로서의 역할이긴 해도 종손은 타고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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