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4. 경주시 안강읍 옥산1리 옥산서원 독락당

옥산서원 독락당독락당 뒤쪽에 있는 계정은 계곡의 암반위에 단아하게 지어진 독락당의 부속건물이다. 계곡의 흐르는 물을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1리 1600 독락당(獨樂堂). 회재 이언적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며, 인심은 천하안위(天下安危)의 근본"이라고 했던 회재 이언적(1491∼1553).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한 심학(心學)을 궁리정심(窮理正心)으로 체득해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서로는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義)', '회재집'등을 남겼으며 문묘와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됐다. 시호는 문원 (文元)으로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장령·밀양 부사 등을 지냈다.

옥산서원 전경.

1531년 사간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돼 경주 옥산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연구에 전념했다. 6년 후인 1537년에 김안로가 죽자 종부시첨정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전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는 좌찬성에 오르고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돼 강계(江界)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

지금도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현판 글씨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가는 사람은 드물다.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 있다. 1층 양쪽 협실과 1층 통문을 갖추었고, 문루 맞은 편 중앙에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있다.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篇額)은 한석봉(한호)이 쓴 것이다. 그러나 구인당의 정면미간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내측에 있는 것은 이산해의 글씨다. 여기에 들르면 당대의 명필을 다 만날 수 있는 셈이다.

구인당 주위에는 양진재(兩進齋),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체인묘(體仁廟),신도비각(神道碑閣), 어서각(御書閣, 經閣), 문집판각(文集板閣), 청분각(淸芬閣)이 있다.

여름철 독락당 담 밑 개울에서 계정(溪亭)과 관어대(觀魚臺)를 보고 있으면 두꺼운 녹음과 흐르는 물로 반쯤은 암반이고 반쯤은 자갈인 맑은 개울,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간다. 회재 이언적의 거처이고 서재였던 관어대는 회재가 김안로와 대립 끝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돌아온 후 거처한 유서깊은 건물로 1516년(중종 11)에 건립됐으며 일명 '옥산정사' 라고도 불리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놓았다. 이 창을 통해 앞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하지 않을 수없다.

독락당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의 동편에는 옥류를 끼고 등심대(燈心臺), 탁영대(濯纓臺),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세심대(洗心臺) 등의 반석이 있고 주위에는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등이 둘러싸고 있는 이른바 사산오대(四山五臺)의 경승을 이루는 곳이다. 또한 인근에는 회재가 소년시절부터 자주 머물러 수학하던 신라시대 사찰인 정혜사터가 있는데, 그 터에는 지금도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선조 5년인 1572년 경주 부윤 이제민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됐으나 서원 재정면에 있어서는 회재 이언적의 손자 준{浚:호,구암(求菴)}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조 7년(1574년)임금으로부터 서원의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한 때는 노복이 2백 수십 명이 됐다고 전한다.

서원에는 장서규모가 워낙 방대해 인근의 정혜사에서 일부를 보관하기도 했고 임진왜란으로 홍문관이 소실돼 1599년 옥산서원에 있던 서책을 나누어간 적도 있으나 퇴계선생이나 관찰사가 옥산서원의 서책을 서원 밖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는 편액(篇額)이 걸려 있고, 정조가 서원의 책을 반출하지 못하게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근년들어 회재 선생 유물전시관 건립을 기획하고 준공까지 2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사업비 8억 7천만 원이 소요된 목조 한식 골기와 건물한 채로 보물 413호인 옥산정사 독락당 뒤편에 있다. 이곳에는 보물 525호인 삼국사기를 비롯, 보물 586호인 회재 선생 수필 고본 일괄 등 보물 총 7종 146점과 기타 전적류, 고문서 등 2천여 점이 수장돼 있다. 전시대 7개소를 비롯한 감시카메라 6대와 모니터까지 갖추고 있어 그간 후손들의 가정에서 분산 보관해 오던 것을 이곳에 모아 안심하고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소중한 유물 중에 특별한 것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소문 보물 제1473-30호.

1566년(명종 21년) 8월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들 전인(全人 1516-1568) 호는 잠계(潛溪) 자는 경부(敬夫)가 왕에게 아버지 죄를 변호하고 신원을 복원해 달라는 간절한 내용으로서 1562년 작성한 상소문 초이다. 1566년 8월에 상소해 1566년 9월 5일 전교가 있어 회재 선생 사후 13년 만에 복작됐으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본보기다.

또 하나는 상소문 보물 제1473-31호 1568(선조 1년) 2월에 아들 전인(全人)은 선조 원년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회재 이언적에게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의 증직을 하사하고 자신에게는 판사(종1품) 벼슬이 증직됐으나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성은에 감사한다는 '사은소(謝恩疏)'다.

전인(全人)의 청렴하고 강직한 충정을 보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탐관오리로 가득한 세상에 선비정신을 이토록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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