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종합사회복지관 권복화

동구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권복화 어르신.

"저는 딱히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일하지 않습니다. 눈에 뜨이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내 몸으로 할 수 있고, 좋은 일이라 생각되면 그냥 합니다. 집을 나서면 길에서는 휴지 줍고, 경로당 가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요양원 가면 목욕시켜 주고 빨래하고, 봉사단체 가면 총무 맡아서 잔심부름까지 합니다. 노인이 좋은 일 좀 하자고 하는데 무슨 장소와 대상이 따로 있겠습니까…. 친구가 나이 여든이 넘어 웬 총무냐고 핀잔을 주지만 저는 일하려고 총무를 자원합니다. 남이 좋아 하는 일 하면 내 마음이 즐겁고 편하거든요"

권복화(82) 어르신은 '사는 게 봉사다' 일상생활 중 봉사 아닌 게 별로 없다. 대담 중에도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원옥당이라는 할머니가 입맛이 떨어져 시원한 물김치 좀 담아 오라는 것이었다. 원노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나이가 아흔이신 노인인데 한 마을에서 외롭게 사시다가 나이가 많아 요양원에 가서는 사람이 그리워서 자주 찾습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셨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여러 곳에서 총무직을 맡아서 힘드시지 않습니까?

"노인들끼리 모여도 힘든 일, 궂은 일, 앞장서 해주면 좋아해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오늘도 마을 경로당에 가서 텃밭에 고추 심고 가지나무도 심었어요. 노인들한테 밥해서 반찬으로 만들어 드리면 고마워합니다. 어떤 노인은 좀 안쓰러워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아직 건강하고 제가 좋아서 하는거니깐요"

-봉사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요양원에 가면 중증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선천적으로 고통을 타고 난 사람도 있지만 80고령에 몸도 아픈데 자식들한테 버림받은 노인도 있어요. 그리고 장애가 심하다고 제 부모로부터 내침을 당한 어린 아이들도 많아요. 그냥 불쌍하다는 말로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선명요육원 같은 곳에 가면은 말도 못하고 굴신도 잘 못하지만 할머니가 찾아가면 좋아서, 반가워서 온몸으로 어찌할 줄을 몰라 합니다. 정말 이런 정경을 보면 뼛속에서까지 뜨거운 것이 올라옵니다. 저들이, 이 요양원마저 없었다면, 가끔 찾아가는 노인네들마저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저네들을 생각하면 저는 된장하고 밥을 먹어도 밥맛이 절로 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해도 힘들지 않아요. 지금 내가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크나 큰 축복입니까? 일전에는 요양원을 갔는데 나이 많으신 노인이 콩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요. 저가 음식 솜씨가 좀 있는 것을 소문으로 아는가 봅니다. 그래서 콩국수를 해드렸더니 눈물까지 보이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미안하던지…. 요육원에 가면 바느질 할 일이 좀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좀 애로가 있지만 바느질하면서 생각합니다. 저토록 할머니를 좋아하는데 저가 손수 바느질한 옷을 입고 신으면 저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간은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고…. 한 번은 친구를 설득해서 같이 갔는데 한 번 가보고는 다시는 안 가려고 했습니다. 중증 장애우들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깨끗이 해도 냄새가 좀 납니다. 그런데 많은 봉사자들이 이 냄새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냄새가 역하다 해도 사람 냄새 아니겠습니까? 늙고 병들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인데…. 저는 평소에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한테 봉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건강이라는 축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어르신이 보는 봉사는 어떤 의미인지? 어르신들에게 한 말씀을.

"봉사란 좋은 것입니다. 직접 해봐야 그 가치를 압니다. 그리고 노인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자상한 할머니가 되어서 바로 하도록 타이르고 억울하다고, 슬프다고 속상해 하는 노인을 만나면 같은 입장이 되어 더 힘들게 사는 노인도 있다고 위로하고 경로당에 가면 며느리 흉만 보지 말고 옛날 며느리였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며느리 입장을 이해하고 좀 도와주자고 그래야 효도 받는다고 뭐 그런 일이 다 봉사 아니겠습니까? 우리 노인들도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날마다 즐겁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힘들 때는 반드시 복지관의 도움을 받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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