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안동 권씨 문중의 제실 운곡서원

울창한 숲속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운곡서원은 한국의 서원이 대부분 경치가 뛰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듯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한국에 있는 서원 대부분은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에 자리한 운곡서원도 마찬가지다. 자연 그대로의 산골짜기, 숲 속에 숨어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는 서원이 있는지도 모를만큼 숲 속에 숨어있다.

특히 유연정 밑, 벼랑끝 같은 계곡은 원시림을 방불케하면서 7~8월에는 피서객들이 계곡을 가득 메운다.

왕신저수지에서 운곡서원으로 접어들자마자 나타나는 울창한 활엽수림, 운곡서원 돌계단에는 수령이 20년쯤 된 매화나무가 줄지어 있어 봄이면 매향에 취한다. 돌계단과 서원의 흙담, 골기와가 어우러진 자연, 약 30여 그루의 매화나무는 발끝마나 잘 익은 매실을 툭툭 떨군다.

고려공신 안동 권씨 시조 태사 권행 신도비.

옛선비들은 서원을 왜 하필 깊고 깊은 산 속에다 지었을까?

이 해답은 운곡서원을 찾아 거닐면서 건물들을 눈여겨보면 알게 된다.

경주 강동면 왕신저수지 동쪽 청수골에 위치한 운곡서원(雲谷書院).

안동권씨 문중의 제실인 운곡서원은 고려 공신 안동 권씨(安東權氏) 시조 태사(太師) 권행(權幸)을 봉정하고 참판 권산해(權山海)와 군수 권덕린(權德麟)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조선 정조(正祖) 8년(1784)에 창건됐다. 그러나 이 서원은 고종(高宗) 5년(1868)에 철폐됐다가 고종말년 사림에 의해 다시 묘지(廟址)에 설단(設壇) 향사(享祀)하고 있다가 1976년 권씨 문중에서 복원했다.

고려 공신 안동 권씨 시조 태사 권행을 봉향하고 있는 운곡서원

강당(講堂)은 굴도리 5량 집으로, 가운데 3칸 마루, 좌우에는 방을 들였다. 가구는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고 종도리와 장혀를 받치고 있는 간결한 구조다. 정면과 대청 후벽 중앙에 운곡서원(雲谷書院), 정의당(正懿堂), 대청 좌우 방문 위에 돈교재(敦敎齋), 잠심재(潛心齋) 현판이 각각 있다. 동·서재는 홑처마 3량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고, 외삼문인 견심문은 1×3칸이다. 사당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에 신위(神位)와 제상(祭床)을 두었다. 전면에 내삼문이 있다. 서원 남쪽에는 비지정문화재인 유연정(悠然亭)이 위치하고 있다.

서원에는 제실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는 정자가 있고, 3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런 은행나무가 있다. 그리고 하인들이 살던 집도 있다.

건물은 본당 (정면5칸, 홑처마 팔작지붕)과 경덕사(정면5칸, 측면2칸, 겹처마, 맛배지붕)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서원은 정조(正祖) 9년(1785) 후손들이 여기에 추원사(追遠祠)를 세우고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 죽림 권산해(竹林 權山海)와 귀봉 권덕린(龜峯 權德麟)을 배향하다가 고종(高宗) 5년(1868) 금령으로 훼철된 것을 광무(光武) 7년(1903) 단을 세워 제향해 오다가 1976년 중건하고 향의(鄕議)에 의하여 운곡서원(雲谷書院)으로 개호(改號)했다.

서원 남쪽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된 유연정(悠然亭)이 위치하고 있다.

유연정은 안동 권씨 종중에서 조선 순조 11년(1811)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권행과 권산해, 권덕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운곡서원에서 약 50m 떨어진 동쪽 계곡 용추대 위에 세웠으며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본받은 듯 주위 자연경관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때문에 선조들의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로 1800년대 초기 건축 수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태사공 권행은 안동권씨 시조로 신라의 경주 김씨였다.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태조 왕건에게 귀의한 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사이에 있었던 고창전투(지금의 안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태조는 '권행은 기미를 잘 알아 권도를 썼으니 권(權)에 능하다.' 하며, 권씨로 성(性)을 내리고 태사벼슬을 제수하니, 곧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됐다. 이후 안동권씨는 부와 명예를 함께하며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권덕린은 권행의 후손이다.

회재 이언적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명종 8년(1553) 25세에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이언적이 유배지에서 죽자 그를 위해 옥산서원을 창건했다.

권덕린이 선조6년(1573) 45세에 죽자 운천서원(雲泉書院)에 제향했다가 뒤에 이곳으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죽림 권산해 (1403~1456)역시 권행의 후손으로 종부사첨정으로 있다가 단종이 귀양가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 이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 잡히자 투신 자살했다. 세월이 흘러 정조 13년(1789)관작이 복위되고, 정조 15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도 배향됐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운곡서원 은행나무 '압각수'는 죽림 권산해의 후손인 권종락이, 단종 때의 권산해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서울을 왕래할 때 순흥에 있는 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원래 뿌리가 깊은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리며, 근원이 먼 물은 마르지 아니하고 도도히 흘러 큰 강을 이룬다고 한다.

오늘의 우리는 뿌리를 모르는 나무가 되어가고 있고, 근원을 모르는 샘이 돼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후손 권혁광씨는 말한다.

"자기를 알고, 자기의 근본을 바로 알 때, 긍지와 의욕이 생겨난다"는 후손을 보면서 '뿌리'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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