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6. 경주 최씨 광정공파 집성촌 백불고택

400여년전 지어진 백불고택은 대구지역에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오래된 집에 들어서면 그 시대 사람들의 숨결소리가 들린다.

대구시 옻골에 위치한 경주최씨의 집성촌에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양식과 생활을 볼 수 있는 곳, 백불고택.

백불고택은 대암 최동집(催東集)이곳에 정착하면서 그의 손자 최경향이 1694년에 지은 곳으로, 경주 최씨의 종가다.

1982년 3월 4일 대구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후 2009년 6월 19일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1616년 조선시대 학자인 대암 최동집의 후손이 지었으니 모실과 보본당과 사당 등이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백불고택 전경

14대를 면면히 이어온 경주 최씨의 세거지는 그 입구부터 속세와 떨어져 고고함을 자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옻골은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 현재 20여 호의 고가들이 어우러져 있다.

도심의 번화가에서 몇 백m 벗어나면서부터 시야에 드는 팔공산 내룡(來龍), 마을 초입의 서원 옛터 주변 계곡물과 낙락장송 군락들은 반가의 격조를 더해주는 풍경들이다.

옻골은 마을 남쪽을 뺀 나머지 3면의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 붙은 둔산동(屯山洞)의 다른 이름이다. 거북의 옆모습처럼 생긴 산자락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사당(報本堂祠堂)을 비롯한 20여 채의 조선시대 가옥으로 이뤄져 있다. '명미(明媚)한 풍광(風光)' 가운데 압권은 역시 진산(鎭山) 주봉 위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듯 거대한 거북 바위 '대암(臺巖)'이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생구암(生龜巖)'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보본당의 모습.

'백불'은 조선 정조때 학자인 백불암 최흥원의 호(號)다.

백불암의 호를 풀이해 보면 분위기는 이내 숙연해진다. 송대(宋代)의 대 철학자 주자(朱子)의 어록에서 나온 말로 '백부지(百不知) 백불능(百弗能)'.

"모든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백불고택은 현재 대구지역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694년(숙종20)에 지은 'ㄷ'자형의 안채와 1905년(고종42)에 지은 'ㅡ'자형 사랑채로 이뤄져 있는데, 지붕은 모두 책을 펴서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 즉 八자형 지붕인 박공지붕(일명, 뱃지붕 또는 맞배지붕이라고도 함)으로 돼있다. 안채와 사랑채, 재실, 가묘, 별묘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조선시대 양반건축과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불고택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돌담길. 양반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고택을 찾아 마을 초입으로 들어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보호수로 지정된 350년 수령의 느티나무다.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역시 350년 수령의 거대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방문객을 맞이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심었다는 이 나무는 높이가 무려 12m다.

대구지역 조선시대 가옥 중 가장 오래된 종가 및 보본당(報本堂) 사당은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을 반영해 지은 건물로, 마을가장 안쪽에 있다.

사랑채의 동쪽 토담 안에 있는 이 건물은 1742년(영조18)에 지은 것으로 현재 재실로 사용되며 그 뒤편에는 가묘와 별묘의 사당(祠堂) 2동이 각각 일곽의 흙담장 안에 배치돼 있다.

가묘와 별묘, 보본당으로 이어지는 조상과 관련된 공간은 양의 상징적인 의미인 동쪽에 배치하고, 이에 비해 생활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음의 상징인 서쪽에 배치하고 있어 풍수지리 및 음양호행사상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도심이 발달할수록 모든 주택은 현대식으로 개축됐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고택과 옛길, 전통 양식의 돌담은 옛 양반가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둘러 보기에 손색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건축 당시 사랑채는 촤로 지었었으나, 1918년 중건하면서 사랑채도 안채와 같은 와가로 변경했다고 한다.

고택의 오른쪽으로는 보본당이 서있다. 경주최씨 종가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53년에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임시학교로 활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토담을 따라 가다 보면 정려각이 보인다. 이는 백불암 최흥원의 효심을 기려 1789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정려각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다. 또 정조가 백불암 최흥원의 업적을 칭송해 하사한 문서를 비롯해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고서와 호패,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로 만든 성학십도 병풍, 제기 등 다양한 유산이 남아 있다.

왼쪽에는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14대 종손 최진돈씨(61)가 살고 있는 곳이다.

원형에서 달라진 것은 겨울 추위에 대비해 설치한 보일러뿐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한옥 특유의 시원함과 주변의 시원한 바람 때문에 에어컨이 필요없다고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까닭에 문명의 이기가 끼어들어 일부 가옥은 현대식으로 개량됐지만, 아직도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은 남아 있어 옻골 백불고택은 대도시에서 발견한 가장 뜨거운 전통의 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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