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전체 박물관 만들기' 아름다운 결실 맺다

지난해 가을걷이가 끝나갈 즈음인 10월 23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 마을회관 앞에서 풍년농사에 대한 감사와 마을안녕을 기리는 마을 축제가 열렸다.

'이칸정지 띠디리고 삼칸정지 춤을 추네'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날 축제는 풍물단이 치는 장단에 맞춰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신명나는 잔치가 펼쳐졌다. 그런데 이 풍물단의 뒤를 따르는 만장들이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풍물단에 앞장 선 '영오리 천왕제'라는 만장만하더라도 큼직하면서도 단정하게 쓰여있었지만 뒤따르는 만장들은 들쑥날쑥한 글씨로 뭐라 썼는지 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을내력을 모르는 외지인들은 마을이장 신동수씨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무슨 저런 만장이 다 있냐'고 비아냥거릴 수 있을 만큼 조잡했다.

그러나 신동수 이장의 설명에 함께 자리했던 외지인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마저도 숙연해 졌다.

특히 박순덕 할머니(77)가 쓴 만장의 사연과 내용을 읽어내려갈 즈음엔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수 밖에 없었다.

10여년전 세살바기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자식을 대신해 홀로 손주를 키워온 박순덕 할머니가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글자로 배운 뒤 처음으로 내놓은 글씨였다.

'나의 소원은 우리 동규가 밥 잘먹고 몸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하고 큰 사람되기.'(사진)

박할머니는 마을축제때 쓸 소원문을 적어라고 하자 비가 오면 비에 젖을까, 추우면 손이 곱을까 문밖을 내다보며 애태웠던 마음을 하얀 천위에 삐뚤빼뚤한 붓글씨로 써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쓴 그 볼품없는 만장은 축제나 푸르른 가을하늘보다 더 맑고 푸른 모습으로 영오리 하늘에서 예쁘게 펄럭였다. 이런 할머니의 애절한 바람 덕분일까 동규는 어느 새 16살의 늠름한 고등학생이 돼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이종욱기자 ljw714@kyongbuk.co.kr

"까르르 까르르, 호호호! 하하하!, 이야아~~~"

도시 놀이터에서는 손쉽게 들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들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시골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급속한 산업화속에서 젊은이들이 힘든 농사일을 버리고 도시로, 공장으로 떠나면서 우리네 시골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경로당으로 변해 '60대 청년'이란 말이 생겨났다.

그런 속에서 아이웃음소리, 10대 청소년들, 20대 청년들을 손쉽게 듣고 볼 수 있는 시골마을이 있다.

바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 마을이다.

영오리는 조선중엽인 지난 1592년께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배한종이란 분이 들어와 살면서 달성 배씨 집성촌이 됐다.

그리 좁지 않은 들과 마을 앞을 흐르는 이언천, 그리고 마을북쪽의 매복산을 중심으로 소쿠리형태의 아담한 지역이어서 사람살기에 적당한 곳이어서 배씨 집성촌이 되기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듯하다.

이를 반증하듯 마을입구에는 신라말기 또는 고려초기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서 있어 예로부터 이 마을은 '미륵골'이라 불리기도 했고, 미륵골이 변해 '먹골'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영오리에는 먹골에 35가구, 덕천골에 25가구 등 약 72가구 174명의 주민들이 오손도손 살며, 마을을 지켜왔다.

이 마을은 현재 참외와 오이 등 특작물로 높은 소득을 올리면서 다른 시골마을과는 달리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어린아이부터 90대 최연장자까지 세대별 20명 내외씩 고루 분포된 이상적인 마을이 됐다.

이런 영오리가 지난해부터 400년 역사를 담은 마을로 거듭나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발벗고 나섰다.

무엇보다 마을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천왕제의 명맥을 잇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이 마을 전체를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는 인심좋고 화기애애하던 마을을 더욱 끈끈한 정으로 이어줘 마을전체가 한가족같은 마을로 태어나고 있다.

변화의 시작은 지난해 정월 초이틀 입향조때부터 이어져온 천왕제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마을사람들의 뜻이 모아지면서 부터다.

신동수이장과 달성 배씨 후손인 배영동씨 등이 천왕제를 보존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칠곡군 교육문화회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생활문화공동체사업에 공모토록 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이란 한마디로 마을 전통을 살리면서 지역 문화예술단체 활성화를 동시에 이루기 위한 사업으로 영오리가 시범마을로 선정돼 6천400만원의 사업비를 받게 됐다.

문광부의 지원을 받은 영오리 주민들은 곧바로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대구인문사회연구소(대표 신동호) 등과 머리를 맞대 자원조사와 함께 발전방안을 마련했다.

먼저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천왕제를 더욱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풍물단을 만드는 한편 단장을 맡은 배영동씨는 이참에 천왕제보존회까지 만들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이장과 반장, 노인회와 부녀회, 청년회, 풍물단 등이 참여한 가운데 마을의 모든 일을 이끌어갈 장단계를 만들어 주민뜻을 모았다.

또 마을 노인들의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생애이야기를 만드는 한편 마을내 300년생 은행나무를 비롯 집집마다 살아숨쉬고 있는 옛것을 생생해 체험할 수 있는 오동박물관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주민이 아닌 사람도 손쉽게 마을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먹골 연예인집''늦둥이집''배씨네 종가집''풍물단장집' 등 집집마다 저마다의 특색을 담은 예쁜 문패를 내걸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영오리 주민들은 지난해 10월 23일 온 동네주민은 물론 인근 사람들을 초청한 가운데 첫 축제를 열었다.

덕천리 우상림할머니(83)의 생활노동요에서 따온 '삼칸정지 춤을 추네'라는 이름아래 열린 이 축제는 마을을 대표하는 천왕제를 시작으로 덕천리 생활노동요, 오동풍물단 공연 등이 이어지면서 신명나는 한바탕 놀이로 마을번영을 기원했다.

특히 이날 축제에는 칠곡군 교육문화회관이 1천만원의 예산지원으로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운 마을노인들의 소원문을 만장으로 내걸어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됐다.

신동수이장은 "400년을 넘게 이어온 우리 마을의 전통을 살리고, 주민 모두가 행복하고 잘사는 마을이 됐으면 하는게 가장 큰 바람"이라며 주민들과 함께 환하게 웃었다.

한편 영오리는 올해도 문광부에 2차 사업을 신청해 놨으며, 칠곡군은 오는 11월 인문학축제의 대미를 영오리 '삼칸정지 춤을 추네'로 장식한다는 계획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