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보문동 608에 위치한 사적 제180호 신라 진평왕릉.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들어가는 길의 오른쪽으로 들어서니 진평왕릉이 나온다. 지금까지 본 여느 왕릉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오릉이나 대릉원처럼 도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왕릉들처럼 울창한 소나무가 우거진 곳도 아니다. 제법 먼 곳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거대한 모습으로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바로 안내판이 보인다.

이두를 만든 '설총의 묘'.

신라 진평왕릉(新羅 眞平王陵)

사적 제18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김백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진(陳)나라·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은 신라 26대 왕이다. 진흥왕의 손자이며 무엇보다 유명한 서동요의 여주인공인 선화공주의 아버지이다. 그의 또 다른 공주인 덕만은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된다. 또한 진평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출중한 인재를 발굴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다.

진평왕의 가계를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첫째는 27대왕이 되는 선덕여왕이고, 둘째는 김용춘(김춘추 아버지)의 아내 천명공주(천명부인), 셋째는 백제 무왕의 아내가 되는 선화공주(무강황후)이다.

진평왕은 오랜 기간 재위했다. 무려 53년 동안이나 왕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더구나 형제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삼국유사』에서는 '성골(聖骨) 남자가 씨가 말랐다'(聖骨男盡)고 했다. 성골로는 진평왕 딸인 덕만공주가 남아있었다. 남자건 여자건 성골이 씨가 마르지 않는 한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으므로 덕만공주가 여성임에도 왕이 되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성골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 왕궁에 살고 있어야 한다. 신라는 대궁, 양궁, 사량궁이라는 세 궁궐이 있었는데 왕의 형제, 가족이라 해도 왕궁을 떠나면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 따라서 진평왕이 죽었을 때 궁궐 안에 남아있던 성골은 덕만공주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선덕이 처음으로 여자임에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이러한 신라 골품제 운영 원리 때문이라고 한다.

성골 남자가 없는 가운데 왕이 된 선덕여왕은 재위 15년만인 서기 646년 비담이라는 자가 명활산성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킨 와중에 숨을 거둔다. 이제 누가 왕위를 계승할까? 성골 남자는 없어졌고 같은 성골인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으니 다른 성골을 찾아야 한다. 만약 없으면 진골이 왕이 된다.

그런데 선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신라 왕궁에는 또 다른 성골 여성이 있었다. 바로 동륜태자의 아들인 국빈갈문왕의 딸 승만이었다. 승만이 결혼 여부를 떠나 왕궁에 살았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여전히 성골이었다. 우리 역사상 두 번째 여왕인 진덕여왕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진덕여왕까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성골은 정말로 씨가 말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찾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축출되면서 신분 또한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진 김춘추가 가야왕족의 후손이자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의 무력을 등에 업고 왕이 되니 이로써 신라는 진골왕 시대로 접어든다.

진평왕에게는 받침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평왕은 사냥을 무척 좋아했는데 죽어서 무덤 속에서도 충언을 계속한 김후직 덕분에 사냥을 그만 두고 나라 일을 돌보게 되었다. 화랑이 지켜야 할 계율인 세속 5계를 가르친 원광법사가 있었고 용감한 화랑인 귀산과 추항, 가잠성을 지키려했던 부자 찬덕과 해론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진평왕의 때의 부흥이 가능했으리라.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든든하게 지키고 섰다. 주로 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소나무와 우람한 덩치의 회화나무다. 왕릉 옆에는 높게 솟은 버드나무도 한 그루 서 있다. 왕릉의 벗이 되어 오랫동안 함께 해온 모양이다. 찾는 사람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

먼저 온 젊은 부부가 산책을 하고 있다. 아기에게 미리 진평왕의 인품이라도 전하려고 온 것일까. 아기의 아빠는 남산만한 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는다. 아름다운 소나무와 왕릉을 배경으로. 무척 행복해 보인다.

여기저기 모습을 사진 속에 담고 있던 남편은 사진작가가 작품을 남길 수 있는 곳 같다고 하면서 소나무의 자태를 찍어 보여준다. 사진 속의 소나무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벌써 사진작가의 솜씨를 능가할 것 같다. 사진기가 좀 더 좋은 것이었다면.

진평왕릉의 봉분은 크면서도 그렇게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얼굴은 몰라도 자상했을 것 같은 윗대 할아버지의 산소 같은 느낌이다. 귀여운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등을 타듯 능을 올랐는지 봉분 꼭대기까지 길이 나있다. 그렇게 올라도 야단치지 않을 것 같이 푸근해 보이는 능이다. 능 앞에는 높다란 혼유석이 놓여있다.

눈을 돌리니 밑동만 남은 고목이 보인다. 앗, 순이 올라와서 대를 잇고 있다. 할머니의 흰머리에서 검은머리가 새로이 나듯이 새순이 나와서 생명을 잇고 있다. 천년의 향기, 신라는 무너졌지만 그 뿌리는 살아남아서 새로운 신라의 부흥을 바라는 건 아닐까. 진평왕이 위기를 기회 삼아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쌓은 것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나서 미래를 설계해야겠다. 미물인 나무도 이렇게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데 조금 힘들다고 주저앉으면 안 되겠지.

오랜만에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느껴보았다. 마치 고향에 온 듯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신라에 왔을 때 세 보물이 있어서 침범을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라의 삼보는 인도의 아육왕이 보낸 황금과 황철로 만들었다는 황룡사의 장륙존상, 선덕여왕 때 자장스님의 건의에 따라 백제에서 아비지라는 뛰어난 기술자를 데려와서 세웠다는 구층목탑, 진평왕이 즉위하던 해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서 받은 옥대이다. 재위기간 53년, 시조 박혁거세왕 이후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진평왕, 옥황상제가 내렸다는 천사옥대를 두르고 큰 제사를 올린 그분의 인품을 나름대로 그려본다. 사방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만큼이나 너그러운 얼굴을 가지지 않았을까. 떠나려는데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마을로 들어서니 왼쪽에 아담한 무덤이 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두를 만든 '설총의 묘'이다. 함께 둘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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