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부부의 신라왕릉 탐방-13 선덕여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 79-2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우리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을 만나러 가는 날, 초여름의 날씨가 무지 덥다. 이정표를 따라 길을 들어서니 바로 당간지주가 나온다. 발굴중인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가 여긴가 보다. 사천왕사는 경주 낭산(浪山) 자락 아래에 위치했던 절이다. 신라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되었는데 '제망매가', '도솔가'라는 향가를 지은 월명스님이 거처했던 곳이라고 한다. 올라가보니 몇 개의 주춧돌이 절터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천왕사 발굴터 앞쪽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두 개가 황폐해진 터를 지키고 있다.

선덕여왕릉은 그리 높지 않은 경주 낭산에 있다. 선선한 날씨라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오르기 좋은 길이다. 하지만 평지에서도 조금만 걸으면 땀이 뻘뻘 날 정도이니 오르는 길이 쉽지 않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는 철길 아래 구멍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산로가 나타났다.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실성왕 12년(413년)에 구름이 일어 누각처럼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는데,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니 평범한 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한참을 오르니 소나무 숲 사이로 단정하게 자리한 선덕여왕의 능이 보인다. 마치 그곳에 빛을 가득 모은 듯 환하게 우리를 맞아준다.

능 주위는 소나무가 빽빽하다.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보초를 섰는가? 성품이 어질고 지혜가 뛰어났던 선덕여왕, 그의 능은 별 구조물이 없이 깔끔하다. 단지 자연석들을 이용한 석축이 2단으로 쌓여있고, 세로의 긴 보호석이 중간 중간에 자연스럽게 둘러져 있다. 먼저 안내판을 찾았다.

사천왕사지.

신라 선덕여왕릉(新羅 善德女王陵)

사적 제18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 79-2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여근곡.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내가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30여 년이 지난 문무대왕(文武大王) 19년(679년)에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聖)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능지탑.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로 알려져 있다. 첨성대에 사용된 돌의 개수는 361개 반이다. 이것은 음력으로 계산한 1년의 일수와 같다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은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고 벽돌모양의 모전석탑이다. 단층으로 된 탑의 기단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고, 1층에는 돌방을 만들어 그 양편에 금강역사상을 새겨놓았다. 분황사석탑 뒤쪽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에는 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잡아갔다. 용을 찾아서 제자리에 놓아주니 기뻐하였다. 떨어지는 낙엽도 이 우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첨성대와 분황사석탑이 모두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번성한 시대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것들도 찾아가서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아주 지혜로워서 세 가지 일을 예견했다고 한다. 첫째는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이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얻어왔다. 선덕여왕이 보고 모란꽃에 나비가 따르지 않으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꽃씨를 심어 꽃을 피웠는데 과연 향기가 없었다. 선덕여왕은 그림과 씨앗을 준 이유를 알았다.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왕이 여자라고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는 여근곡 이야기이다. 어느 날 영묘사의 '옥문지'라는 연못에 개구리가 떼를 지어 울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곧 알천과 필탄을 불러 여근곡에 적병들이 숨어 있을 것이니 가서 무찌르라고 했다. 과연 백제군이 숨어 있어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여근곡'은 여자의 성기모양과 닮은 골짜기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 번째는 안내판에 있듯이 자신이 죽는 날을 맞춘 것이다. 그 후 문무왕이 지었다는 사천왕사는 우리가 지나온 그곳에 있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예측한 사천왕사 위의 도리천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후대의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했던 어려움도 많았다.

당 태종의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했고 여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유로 비담과 염종이 일으킨 반란도 겪어야했다.

지귀설화는 여왕의 주술적인 신비로움을 형상화하여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하찮은 신분의 백성까지도 챙기는 인자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쉽지 않은 여건이었지만 지성을 갖춘 여왕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선덕여왕에게는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에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릉을 지나 조금 걸어서 산을 넘어가면 '능지탑'이 나온다. 다듬어진 돌을 아주 반듯하게 쌓아놓은 2단의 탑이다. 안내판이 '경주 능지탑지'라고 알려준다.

죽어서도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어 한 문무왕의 화장터라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기단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비교적 정교하여 뚜렷이 알아볼 수 있다. 십이지신상이 능에 새겨진 모습은 보았지만 탑 둘레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다. 문무왕의 거룩한 혼을 지키는 병사인 듯 옷을 갖추어 입고 서있다. 뒤쪽에는 연꽃모양이 새겨진 제법 많은 돌이 쌓여 있어서 탑의 크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라고 유언을 남긴 사후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걱정하는 문무왕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지금도 감포 앞바다에 가면 들이치는 파도를 그대로 받으며 홀연히 앉아있는 수중왕릉 대왕암이 있다. 다시 찾아가서 문무왕의 숭고한 정신을 느껴보아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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