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부부의 신라 왕릉 탐방-14 진덕여왕릉

경북도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 48에 위치한 진덕왕릉.

신라왕릉답사를 하면서 왕릉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냥 무덤이라기보다는 신비한 전설을 안고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답삿길이다.

왕들은 그리도 좋은 곳에 누워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글쎄,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분들에게 어쩜 욕되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덕왕릉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간다. 답사를 온 경주 소재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그분들과 함께 둥치가 제법 큰 소나무 사이로 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빽빽한 소나무 숲길이 일품이다. 왕릉에 다다를 때까지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이 안 될 지경이다. 소복하게 쌓인 솔가리가 발밑에서 폭신폭신 발을 감싸고 숲길의 호젓함을 시샘하는 듯 바람소리가 머리 위를 지난다.

왕릉을 지키는 십이지신상.

얼마 안 가서 단아한 모습으로 단장된 진덕왕릉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전대 왕들에 비해 외곽으로 와서 편안하게 모셔져 있는 느낌이다. 네모난 터에 둥근 무덤이 봉긋 솟아있고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가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양이 냉면 그릇 같다고 한 사람이 있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틀에 넣어 부풀린 머핀 같다. 바라보기만 해야 할 커다란 빵. 축대를 만들어 무덤을 보호하고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식이다. 그런데 눈썹돌 중 하나가 빠져서 뒹굴고 있다. 큰아이와 왔을 때도 그랬는데 아직도 그대로이다. 마치 가지런한 이 중의 하나가 빠진 것 같다.

신라 진덕왕릉 (新羅 眞德王陵)// 사적 제24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 48

슬픈 전설을 간직한 오류리 등나무.

이 능은 신라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勝曼)을 모신 곳이다. 현곡면 오류마을의 뒤편에 있는 안태봉(安胎峰)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으로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국력을 키워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임금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을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능은 지름 14m, 높이 4m인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봉분의 둘레에는 둥근 지대석을 놓은 위에 안기둥을 놓고 사이사이에 직사각형의 약간 둥근 면석을 끼우고 그 위에 눈썹돌을 얹어 봉분 아랫단을 보호하고 있다. 이 안기둥 면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으로 조각 하였다. 이 능의 아래쪽에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어 봉분을 보호하고 있을 뿐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된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 수리된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문화유산해설사가 긴 설명을 한다. 총총 모여 앉은 선생님들은 오늘만큼은 마치 학생이 된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진덕여왕은 신라 두 번째 여왕이지만 선덕여왕과 무열왕 사이에 있다 보니 그들보다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왕이다. 하지만 7척에 달하는 장신에 긴 팔과 다리를 가졌고,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매끈하여 요즘 말하는 '쭉쭉 빵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다가 총명함까지 더해,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왕이었다는 것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 중에 죽으면서 남자 성골이 없어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때는 백제와 고구려의 강력한 공격으로 신라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점차 당나라에 의존하게 되었다.

진덕여왕이 비단에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수로 놓아 당나라 황제에게 바치고, 관리의 휘장과 복식을 중국의 제도에 따르는가 하면,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것을 두고 말이 많지만 망국적 상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몸부림이었다.

또한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크게 써 나라의 위험을 지혜롭게 넘겼다. 진덕여왕을 지혜로운 여왕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러한 정책들이 훗날 가장 약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진덕왕릉은 산 중턱을 깎고, 석축을 쌓아 평평한 땅을 만들어 그 위에 봉분을 얹었는데 공간이 협소하여 다른 왕릉에 비해 좁은 느낌이다. 봉분은 높지 않지만 지름이 커서인지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능의 아랫단에 판석으로 보호석을 두르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오래된 돌 빛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때문인지 무덤가에 있어도 온기가 느껴진다. 떨어져나간 돌만 제자리를 찾는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한다. 뱀띠인 내게 뱀이 먼저 보이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럴 것이다. 열두 마리의 동물 모두가 석공의 노력으로 살아나서 능의 주인을 보살피고 있다. 십이지신이 지키고 있음에도 1997년에 도굴꾼이 능을 범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굴갱의 크기는 가로 1.3m, 세로 2.4m이다. 삽과 곡갱이를 이용하여 봉토 내면 4.5m 깊이까지 파 들어가 석실 벽면을 뚫었으나 토사가 무너져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신라고분에 유물이 많다고 하지만, 시내에 있는 적석목곽분이 아니면 보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도굴꾼은 몰랐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이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십이지상의 부조는 약하게 조각되어 있어 선명하지 않다. 살아 있다는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런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다.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 왕이 자주 교체되고 나라의 힘이 약해져 전임 왕릉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때 조각된 양식이다. 이런 점들을 들어 이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고 제45대 신무왕의 능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오늘도 왕릉을 찾아온 많은 사람 중의 한사람이 된다. '그저 왕릉이구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릉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억하려 노력한다. 지식으로서가 아닌 작은 느낌을 기억해 둘 것이다.

아름다운 여왕의 능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무덤 위에는 예쁘게 꽃을 피운 꿀풀과 개망초가 바람에 몸을 싣고 살랑거리고 있다. 잘 가라고 손 흔드는 꽃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초입에 있는 등나무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발길을 붙잡는 것일까?

오류리 등나무는 신라 연인의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신라 때, 이 마을에 예쁜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이웃집 총각을 함께 사모했다. 총각이 전쟁터로 떠날 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양보하기로 했으나 총각의 전사소식을 듣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자매는 울다가 지쳐서 연못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등나무가 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총각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으나 슬픈 사연을 듣고 연못에 몸을 던져 죽어 팽나무가 되었다. 지금도 등나무가 된 두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팽나무를 사모하고 있는 듯하다.

연못이 정말 있었을까? 지금은 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밭에서 밭일을 하던 할머니가 대답을 해주신다. 40년 전 시집을 왔을 때는 움푹한 곳에 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덕여왕에게는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이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 꽃피우지 못한 그들의 사랑을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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