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원성왕릉

경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에 위치한 신라 38대 원성왕릉 전경.

제36대 혜공왕(惠恭王)과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은 왕릉이 전해지지 않아 제38대 원성왕릉으로 향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이곳에는 물이 많아 괘를 걸어 능을 만들었다는 괘릉이 있다. 괘릉은 바로 신라 38대 원성왕릉이라고 알려져 있다. 경주에서 울산방면으로 7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길가에 인접한 능의 입구가 보인다.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과 삼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앞이 훤하다. 모두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 정비된 것이라고 한다.

원성왕은 폭우의 덕을 톡톡히 본 왕이다. 선덕왕의 뒤를 이을 사람은 이찬 김주원이었는데 하늘은 각간으로 있던 김경신의 손을 들어주었다.

왕릉을 호위하는 서역인 무사.

김경신은 꿈에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채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갔다. 점쟁이가 해몽을 했는데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이라고 했다. 걱정을 하고 집에 누워있는데 아찬 여삼이 찾아와 다시 해몽을 해주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라고 했다. 그리고는 북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김경신은 그의 말을 들었다. 선덕왕이 죽자 명주에 살고 있던 김주원이 북천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내물왕의 12세손인 김경신이 즉위하여 원성왕이 된 것이다.

왕릉을 호위하는 돌사자.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원성왕.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완비된 형태의 석물을 갖추고 높다랗게 앉아있는 원성왕릉을 보면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이렇게 완벽한 왕릉을 보지 못했다. 석물을 갖춘 왕릉 중에 성덕왕릉이 있었지만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규모도 작았다.

안내판을 먼저 찾아서 읽어본다.

괘릉(掛陵)//사적 제26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김경신)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좌우에 화표석·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碧骨堤)를 고치기도 하였다.

가장 남쪽인 입구에 8각으로 된 화표석 한 쌍이 동서로 벌려 서 있고 북쪽으로 가면서 무인상과 문인상이 각각 한 쌍식, 그리고 돌사자 두 쌍이 차례로 서 있다. 좀 더 높은 위치에 호석과 상석이 잘 갖추어진 무덤이 근엄하게 앉아 있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을 듣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다 되었지만 관광객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우리와 함께 해주었다.

먼저 무인석을 자세히 보라고 한다. 한 손에는 철퇴를 쥐고 다른 한 손은 가슴까지 구부리고 있는 무사상은 우리나라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콧수염이 八자 모양이고 수염이 곱슬곱슬한 것을 보면 서역인의 모습이다. 당시 서역과 잦은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한다. 문인석은 앞면은 평복을 입은 문인의 모습인데 뒤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가진 무사의 모습이다. 무인석과 문인석은 키도 엄청나게 크다. 무려 257cm나 된다고 한다. 아마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잡귀가 무서워서 근접을 못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돌사자의 모습도 자세히 보라고 한다. 한 가지 모양의 돌사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정되게 앉아 있는 돌사자도 있고 뛰어오를 듯이 앞발을 세운 돌사자도 있다. 보고 있는 방향도 다르다. 역할을 분담하여 사방을 두루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석물들을 둘러보니 신라시대의 거대한 조각품들을 감상하는 시간 같다.

한 때는 괘릉이 물과 관련 있다는 기록 때문에 문무왕의 무덤이라고 여기고 제를 지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괘릉이 원성왕릉이 틀림없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하면서 해설사는 길게 설명을 한다.

숭복사지에서 최치원이 쓴 대숭복사비문의 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내용이 전라북도 구암사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필사본과 같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비문에는 원성왕의 장례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절을 옮기고 왕릉을 만들었답니다. 이곳에는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고니 곡자를 써 곡사라고 하였고, 옮긴 절 이름도 그대로였으나, 885년에 후손 헌안왕이 대숭복사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절을 옮길 때 사람들이 자진하여 모여 기왓장, 서까래 등을 옆 사람에게 넘겨가며 운반했는데, 거리가 5리에 뻗쳤습니다. 실제로 괘릉에서 숭복사까지는 2㎞가 된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지금까지 괘릉으로 불린 이 무덤은 원성왕릉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해설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봉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봉분 둘레에는 무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말이 있는 곳이 정 남쪽, 쥐가 있는 곳이 정 북쪽이라고 하여 방향을 가늠해본다. 왕릉은 정 남향을 하고 있다. 햇볕이 아주 잘 들 것이다.

물이 많은 곳이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높은 지형이라서 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주위가 질척하다. 더구나 요즘은 가뭄이 계속 되고 있는데다가 무덤 둘레에는 배수로처럼 물길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배수로에도 물기가 배어있다. 원성왕은 물 덕분에 왕이 되었는데 죽어서도 물 위에 수상가옥을 지어놓고 사는 형국이라.

왕릉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외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아 왕릉을 둘러보러 왔다고 했다.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제야 찾아보는 왕릉인데…. 잠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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