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주 한개마을

옛 골목길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경북도 지정문화재 9채·재실 6채 등 75채 가옥 남아

성산이씨 집성마을로 이원조·이진상 등 유학자 배출

전통가옥-담장 따라 골목 형성…민족 미적 감각 엿보여

■ 옛 골목길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은 6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마을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격조 높은 선비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전통 민속마을이다.

응와종택 사랑채

특히 마을의 지형이 주산인 영취산(靈鷲山 해발 331.7m)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청룡등(靑龍嶝)과 백호등(白虎嶝)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며, 마을 앞으로 이천(伊川)과 백천(白川)이 서쪽에서 합류해 동남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전국 최고의 길지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이름인 한개는 순수 우리말로서 '한'은 크고 넓다(大)는 뜻이고 '개'는 큰 물이 드나드는 곳(浦)을 나타낸 방언으로, 백천에 제방을 쌓기 이전에 큰물이 졌다가 빠져나가면서 생겨난 큰 개울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마을로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17세기부터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등의 이름난 큰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의 인물을 배출했다.

또 마을의 전통한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담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잘 동화돼 있다.

현재 마을에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9채와 조상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6채의 재실을 포함한 75채의 집들이 있으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전통가옥이다.

또 각 집을 둘러싸고 있는 적당한 곡선의 담장으로 형성된 옛 골목길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마을의 운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 전형적인 풍수형국에 입지한 대표적인 전통민속마을

한개마을은 입지의 생김새가 분명한 가장 전형적인 풍수형국을 보여주는 마을로서 앞으로는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흐르고, 청룡·백호를 완연하게 이루고 있는 해발 325m의 영취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취산을 중심으로 주위의 산들이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는 위치에 있다.

영취산을 주산으로 해 서남으로 뻗은 백호등과 동남으로 뻗은 청룡등이 한개마을을 깊숙히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으며, 한개마을의 중심에서 약 800m 떨어진 곳에 약 70m인 안산(案山)이 위치하고 있는데, 안산의 높이는 주산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높거나 크지 않고 작지도 않다.

한개마을의 가옥은 영취산 산자락 해발 40~70m 범위에 남서쪽으로 마을과 집들이 향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원칙을 따르고 있으며,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에 어느 집에서나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 옛 담장따라 아름다운 골목길이 펼쳐져 있어

한개마을에는 전통가옥과 그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옛 모습을 유지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담장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목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찾는 이들에 옛 고향의 정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개마을의 옛 담장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나눌 수 있다. 외곽담은 마을의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산지에 접한 담과 주택동 쪽의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개마을의 골목길은 장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세대를 이어 만들어지고 또 덧붙여진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한옥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돼 있다.

△ 충절과 문한이 이어진 인재의 산실

한개마을에서는 모두 9명의 대과급제자와 24명의 소과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조선 영조 이후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에 걸친 기간에 특히 집중돼 있다.

이 시기의 한개마을 출신 인물로는 이석구(李碩九), 이해진(李海鎭), 이석문(李碩文), 이규진(李奎鎭), 이민실(李敏實) 등이 있다. 또 19세기에 등장한 두 인물, 이원조(李源祚)와 이진상(李震相)이 배출되게 되면서 한개마을은 선비마을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19세기에 활동한 응와 이원조는 유가가 지향하던 학자적 소양과 경륜가로서의 능력을 함께 겸비한 학자출신 관료로서 영남 주리학의 이론 정비와 학통의 수수에 기여했다.

그의 조카인 이진상은 일찍이 숙부인 이원조의 교훈으로 학문에 전념했는데, 당시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묘충록(畝忠錄)을 저술해 제도개혁을 염원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뜻을 같이하여 글을 지어 고을에 돌리기도 했다.

그의 문인에는 흔히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인 곽종석(郭鍾錫), 이승희(李承熙), 허유(許愈), 이정모(李正模), 윤주하(尹?夏), 김우진(金鎭祐), 장석영(張錫英), 이두훈(李斗勳) 등이 영남지역의 학풍을 이끌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주학파(寒洲學派)가 형성됐다.

20세기에 들어온 이후 한개마을의 성산이씨들은 일제의 강점이라는 국권상실에 직면하여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건국훈장 대통령장)를 위시해 이기형(건국포장), 이기정(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원(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표창) 등이 독립운동에 참가해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마을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등 그 역할을 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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