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경순왕릉

▲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에 위치한 경순왕릉

고려 왕건에 나라 바친 '비운의 왕'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벗어나

오랜시간 실전됐다 영조때 재정비

사악한 기운쫓는 장명등 등 세워진

조선시대 사대부의 묘 격식 갖춰져

풍파에 훼손된 신도비 쓸쓸함 더해

▲ 경순왕릉 표지석

이제 남은 신라왕릉은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뿐이다. 제56대 경순왕은 46대 문성왕의 6세손으로 이름은 부(傅)이다. 그는 천년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신라를 통째로 고려의 왕건에게 바친 비운의 왕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자결을 하고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몇몇 신하와 태자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자고 하였으나 경순왕은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며 나라를 바친 것이다.

▲ 경순왕릉 신도비

경순왕은 정승공에 봉해졌고 왕건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받았다. 왕건 역시 경순왕의 백부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태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먹고 살았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마의태자라고 하였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다시 가본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지난겨울에 갔던 답사기로 대신한다.

▲ 경순왕릉 비각

하루 만에 다녀온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 같아서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여 연천과 가까운 의정부까지 길을 달렸다. 모텔의 침대에서 자는데 줄곧 달린 고속도로의 빨간 불빛이 감은 눈 속에서 아른거렸다.

아침이 밝았다. 그동안의 추위도 한 풀 꺾인 듯 따스한 햇살이 퍼지고 있다. 내비게이션에 경순왕릉을 써넣었다. 낯선 동네의 좁은 길까지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친절한 안내자는 파주를 거쳐 연천으로 안내할 것이다.

높은 산이 없는 평지를 돌고 돌았다. 평범한 우리의 산천이지만 언제나 정겨움을 안겨준다. 점점 남방한계선과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 길과 멀지 않은 곳에 군인들의 초소가 있고 탱크 저지선을 지난다. 평화로워야 할 우리의 땅이 지금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나보다.

여러 개의 구덩이 같은 것이 보여서 뭔가 했더니 남편이 포상이라고 한다. 포 사격 연습을 하는 곳이란다. 군대시절 포대에 근무했던 남편은 낯익은 모습을 보고 감회에 젖기도 한다.

파주와 연천의 경계가 되는 임진강에 이르렀다. 남편이 황포돛배를 타보자고 한다. 그런데 강이 꽁꽁 얼어있다. 얼음을 뚫고 다니는 배는 없을 텐데...

연천에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아 경순왕릉 주차장이 나왔다.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표지석이 멋을 부리고 서있다. 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50m 정도 걸어 올라가니 눈앞에 왕릉이 보인다. 잔디를 깔아놓은 넓은 평지가 있고 언덕 위에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신라 경순왕릉(新羅 敬順王陵)

사적 제244호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

경순왕(敬順王, 927-935 : 재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이며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경순왕이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력이 쇠퇴하였다.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였는데 특히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大勢)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고려 왕건(王建)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경순왕이 경종(景宗) 3년(978)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英祖)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陵表), 양석(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등이 이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運柩)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 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하는 이유로 운구 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릉이 이 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신라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

세 칸으로 이루어진 재실이 있고 바로 옆에 비각도 보인다. 비문이라도 남아 있을까? 들여다보니 돌의 아름다운 무늬만 있을 뿐 글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귀퉁이에 있는 저것이 글자인가? 비각 주위의 어디에도 안내판이 없다. 궁금증을 안고 가파른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크지 않는 봉분이다. 뒤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장명등도 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신라왕릉의 모습이 아니라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묘와 비슷한 격식을 갖추고 있다. 곡장이나 호석은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석양과 망주석 등도 고루 갖추고 있지만 아주 작고 초라해 보인다.

'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겨진 능표는 총탄에 맞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쉽지 않았던 세월을 말해준다. 뒷면에는 경순왕이 묻히게 된 경위가 간단히 나와 있다. 조선 영조 대 다시 세웠다고 한다.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의 주위에는 대부분 소나무가 있었다. 마치 호위무사라도 되는 듯 능을 향하여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런데 경순왕릉 주위에는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참나무 숲이 능지를 빙 둘러싸고 있다. 지금은 겨울의 끝자락이라 참나무의 마른 가지만 스산하게 보인다. 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소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쓸쓸하게 누워있다. 외로운 능을 보고 있으니 망국의 슬픔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왕릉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화유산해설사가 보인다. 해설사는 경순왕릉이 이곳에 있게 된 경위를 간단히 말하더니 경순왕을 긍정적으로 본다면서 나라를 바친 것이 잘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을 높게 본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국력이 쇠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일어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항복을 한다는 것은 지탄받아도 마땅한 일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력하고 힘을 기른다면 극복하지 못할 난세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경순왕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무능한 왕이라고 본다.

궁금했던 비각 안의 비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비는 자연 풍화로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10자 내외이고 서로 연관성을 찾지 못해 경순왕의 신도비라고 짐작할 뿐이라고 한다. 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고랑포초등학교에 가져다 놓았다가 이곳에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전에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경순왕릉과 관련이 있는지 정확하게 몰라서 지금은 없앴다고 한다. 어떤 설명이든 안내판이 있어야 해설사가 없어도 비각의 내막을 알 수 있을 텐데…

경순왕릉의 바로 앞에는 남방한계선이 있다. 수많은 질곡의 역사를 몸으로 겪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이곳에 쓸쓸히 누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후손들을 맞는다. 그 옛날 통일신라처럼 하나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끝>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