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범죄 엄단 강조
두산 일가 '솜방망이 판결' 의식한 듯

이용훈 대법원장이 최근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을 모아놓고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강조한 사실이 밝혀져 향후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이번 발언은 두산그룹 비자금 횡령 사건 피고인 전원에게 1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다음날 나온 것이어서 '두산비리'사건 판결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17일 대법원 등에 따르면 이 대법원장은 최근 단행된 법원 정기인사에서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후배 법관 19명과 법원행정처 간부들을 이달 9일 저녁 서울 한남동 대법원장 공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어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 대법원장은 또 절도범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기업범죄에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이 수긍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른 참석자는 "이 대법원장이 '두산 사건'이라고 못박지는 않았지만 당시 언론에서 두산 사건을 연일 비판한 점에 비춰 박용성 형제 등에게 내려진 판결을 염두에 두고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강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전관예우 문제도 언급하며 "변호사들이 판사를 찾아와 소정의 변론을 막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재판할 때 당사자들에게 구체적인 부분까지 상세히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초청받은 19명의 고법 부장판사 승진자 중 두산그룹 사건의 1심 재판장이었던 강형주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는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았다.

강 부장판사는 "만찬 다음날 선고 기일이 예정돼 있어서 참석하지 않았다"며 "대법원장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전해듣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제가 뭐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저는 판결로서 모든 것을 말했다"며 말을 아꼈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을 놓고 일선 법관들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재경 법원의 한 판사는 "인사권 등 사법행정지휘권을 갖고 있는 대법원장이 특정 사건을 언급한 것은 해당 사건 판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판사는 "특정 사건을 지적하지 않고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강조한 것은 사법부의 수장으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사법부 신뢰 회복 차원에서 이해되는 일이다"는 의견을 내놨다.

법원은 이달 8일 286억원 횡령 및 수백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두산그룹 전 회장 박용오씨와 박용성씨 등 11명에 대해 공소사실 모두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전원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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