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1548~1631)은 경남 거창 사람으로 조선 명종 3년에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조선시대 예문학을 발전시켜 사례(四禮)를 중심으로 조선예문의 절정을 이루게 한 큰 선비였다.

또한 선조시대에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김 집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조부인 김호는 항상 빈객을 잘 접대하는 인심이 아주 후덕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남루한 선비 한 사람이 찾아와 유숙하기를 청하여 엄동설한 늦은 밤에 저녁상을 처려준 적이 있다. 그러자 과객은 따로 수저와 그릇을 청하여 밥을 덜어놓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김호가 의아해서 과객에게 묻자 과객이 말하기를 “오늘이 어머니의 제삿날인데 집 한 칸 없는 몸인지라 이렇게라도 제사를 모셔야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김호는 맏며느리를 불러 3채 5어를 준비하여 정성껏 제사상을 새로 차려주었다. 이에 과객은 “이렇게 따뜻한 제사상을 어머니께 올리는 것이 처음”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감복했다.

그런 일이 있은지 8년 후 까마득히 잊을 무렵, 꿈속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8년전에 이 집에 와서, 죽은 이후 처음으로 제사를 가장 잘 얻어 먹었습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옥황상제께 8년간 기도하였더니 구슬 두 개를 주며 은혜에 보답하라 ”하시기에 늦게나마 이 구슬을 드리니 “집안에 잉태기운이 있을 때 한 개씩 삶아 먹이면 혈식군자(학식이 높은 큰 인물을 칭함)를 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호는 그 구슬을 받아 농안에 넣고 꿈을 깼다. 지난 밤 꿈이 하도 신기하여 농안을 들여다보니 실제로 구슬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제사상을 차린 며느리에게 구슬 한 개를 먹여 김장생이 태어났고 김장생의 며느리에게 나머지 한 개를 먹여 김집을 낳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로서 김장생의 탄생설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은 조선조의 대학자로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집안을 일으키고 많은 후학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예문학의 집대성에 절대 공헌한 사람이기도 하다.

왜 필자가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제사를 초저녁에 지내면 안되느냐?” 하는 상담이 요즘들어 부쩍 많기도 하고 사실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늘어나는 추세를 간과할 수 없고 보기에도 매우 민망하기 때문이다.

초저녁 제사는 일단 “잘못된 관행이다”라고 못박고 싶다. 첫째, 입제일이란 살아있던 날이므로 제삿날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돌아 가신 날, 즉 기일날 초저녁이라면 살아있는 후손이 아침 점심을 다 먹은 후 늦게 조상에 밥을 올리는 예의에 어긋나는 몰상식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가당치 않는 초저녁 제사 풍습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정의 법도가 바로서고 풍습과 예절이 바로 섰을 때 비로서 그 가정은 반듯하게 되며 훈기가 있는 집안이 되는 것이다.

예출어정(禮出於情), 예의에서 모든 정서가 나온다는 말이다. “제사는 꼭 자정에 모셔야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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